[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신사임당에 비견되는 자녀교육의 모범 정경부인 고성이씨
2012.09.20 03:29 등록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은 국보(5)와 보물(35) 사적(2)등 국가지정문화재(76)와  도지정문화재(132)등 총287점의 문화재가 산재한 세계역사도시이다. 또한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진입하다가 좌측에 보면, 보물 182호인 임청각과 국보 16호인 신세동 법흥사지 7층전탑(法興寺址七層塼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85호인 고성이씨 탑동종택이 있다. 이곳의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났다.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이상룡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고성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황(李璜)은 고려때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아 고

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칠세(七世)  이존비(李尊庇,  1233~1287)가 진현전(進賢殿) 대제학(大提學)(현 대학교 총장 격임)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이존비의 손자 행촌(杏村) 이암
(李嵒, 1297~1364)은 원나라의 농서인『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또한 서예에 능하여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盟頫)의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이암(李癌)의 아들인, 이강(李岡)은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장인(丈人)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초기의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강의 아들이자,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이다. 이원의 일곱 아들(대, 곡, 질, 비, 장, 증, 지)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 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 이 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주가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이곳 임천각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함재 서해(涵齋 徐懈, 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다. 이 사람이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 고성이씨 부인이다. 서성의 외조부인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는데, 외동딸은 어릴적 홍역을 앓으면서 불행하게 눈이 멀게 되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서해는 장가를 들기 위해 고성 이씨 댁으로 향하던 중 주막에서 주모의 기절초풍할 말을 들었다.

 

“신부가 맹인인데 참으로 신랑이 아깝다”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신랑측은 즉시 파혼을 하고 돌아가자고 했으나, 도학자인 서해는 “이미 사주단자도 보냈고 장님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맹인인 처녀에게 장가들겠는냐” 며 반대하며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서해의 쉽지 않은 이 선택은 결국 대구서 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되었다. 고성이씨는 비록 맹인이었으나 재색과 학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서해는 처가에서 물러 준 소호헌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면서 행정인 달인인 서성을 낳게 되어 손이 귀한 집안에 경사가 낳다. 현재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보물 475호인 소호헌에는 약봉태실이라는 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서해가 23세 되는 해 서성이 2세가 되던 해 1559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졸지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 고성이씨는 낙담했으나 외동 아들인 서성을 잘 키우는 것만이 요절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 생각하고 자식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맹모삼천지교’와 같이 서성의 숙부 서엄이 있는 한양의 약현(현재 서울시 중림동)으로  1560년 이사를 결심한다. 이런 결정은 교육적인 환경과 학맥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에는 연산군 이후 잇단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에서 태생지도 중요하지만 성장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

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여자의 사주팔자에서 직관력과 자식을 상징하고 음식솜씨 등의 재능은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으로 표현하는데, 아마도 고성 이씨가 식신과 상관이 발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성 이씨는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대지 오천평에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짓는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들인 약봉과 이씨 부인 단 둘에 불과했다.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개인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큰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십년 가지 아니해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내가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내 제삿날을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들인 서성은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까지 올랐고, 그녀의 손자이자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과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고성 이씨 사후에 특히 손자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 증손 15명, 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450여 년 전 이씨 부인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은 오늘날 가문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모

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인물열전의 저자 혜명 류동학 선생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과 대전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과 대전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영동방송(강원)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매일신문(대구)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등 각종 매체에 다수의 저작을 연재했으며, 현재 대구 영남일보에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을 연재 중입니다. ―편집부


혜명 류동학 


 

대기원신보 : http://www.epochtimes.co.kr/news/view.html?smode=title&skey=%EC%84%9C%EC%84%B1&x=20&y=8§ion=165&category=205&no=12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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