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주, 약과를 팔아 공부시킨 서성(徐)

1588년(명종13년)~1631년(인조9년)

 선생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峰), 본관은 달성, 해(嶰)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증조는 사헌부 장령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조졸했고 어머니는 맹인(盲人)이어서 숙부인 서엄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으나 어머니가 훌륭한 현모이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드님을 훌륭하게 키웠다. 아드님 교육을 위하여 서울 약현(藥峴)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약주, 약과를 만들어 팔아 뒷바라지를 하며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귀봉 송익필(龜峰 宋翼弼)문하에서 공부를 시키어 1586년(선조19)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시교(侍敎), 봉교(奉敎)등을 거쳐 예조좌랑에 이어 병조좌랑이 되어서는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이어서 호소사(號召使-근왕병을 불러 모으는 사신)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이 되어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와 같이 함경북도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선생이 계교를 써서 홀로 탈출하여 북평사를 지낸 관북지방의 의병대장 정문부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어 적을 쳐부수고 두 왕자를 비롯하여 모두를 구해냈다. 그리고 행재소(行在所-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 머물러 있는 곳)에 이르자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명장 유정의 접반사가 되었다.
 그 후 삼남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응징하여 관기(官紀)를 바로 잡았다. 돌아 와서는 제용감정(濟用監正-모시, 모피, 인삼, 능나주단 같은 고급물품의 진상(進上)사여(賜與)를 관장하는 관청)에 특진되었고 이어서 경상우도 감사가 되어서는 고성(古城)을 수축하여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으로 만들었으며 충신열사의 사당을 지어 숭모사상을 높이었다. 이어서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한성 판윤이 되어서는 총관주사(總管舟師)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5)에 계축옥사(癸丑獄事-대북파가 일으킨 옥사로 간흉 정인홍, 이이첨 일당이 당시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등이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 였다고 무고하여 유경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홍부원군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다음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가 일어나자 약봉선생도 역적의 일당이라고 몰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단양으로 귀양 보냈는데 다시 영해로 옮기고 또다시 원주로 옮기었다.
적소(謫所)에서 11년 동안 있었는데 공의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이 항상 의연자약하면서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1623년(광해군15) 65세 때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 되어 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종1품 숭록대부에 승차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도 왕을 호종하고 호병을 물리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1631년(인조9) 74세로 서거하였다.
 약봉선생은 학문을 즐겨 당대의 대학자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귀(李貴)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렸다.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고 묘는 포천읍 설운리에 있다.
 약봉선생은 어진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성장하여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뛰어난 지략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해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우리나라애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착한 일을 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하였다.
 약봉이 별세 후 약300년간 인조조(仁祖朝)에서 고종조(高宗朝)에 이르기까지 대구서씨 문종에서 영의정이 8명, 우의정 1명, 대제학 6명을 배출하여 크게 영달한 명문(名門)이 되었다.
 또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자손이 번창 영달하는 것은 그 선조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행실이라고 일컫는 효행이 투철하여 그 음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흘읍 하송우리에서 웃송우리로 가는 왼쪽 노변에 “벼락바위”라고 불리우는 바위가 있는데, 벼락바위라고 이름 지어진 연유는 약봉선생의 선조가 효행이 극진한 분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명당자리에 안장시켜 드리고자 유명한 지관을 찾아가 명당자리를 구하여 광중을 지어 하관을 하고자 하는데 그 때 다른 유명한 지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그 곳이 천하명당인 것은 틀림없으나 하관과 동시에 상주인 장자가 즉살한다. 그 까닭은 산소자리에서 앞으로 멀리 보이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때문이다.”라고 자세히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하관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상주인 장자가 이르기를 아버님을 명당에 모셔드리고 또한 후손이 잘 된다면 내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며 여러 사람의 만류를 물리치고 하관을 강행하니 그때 별안간 뇌성벽력으로 벼락이 쳐 바위가 깨어져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주인 장자도 무사하였고 그 후손이 번창 영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벼락을 쳐 깨어진 바위틈에는 향나무가 자생하여 자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http://www.pcs21.net/culture/cultural_inheritance/content/content_4114.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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