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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法門寺
산시성(陝西省) 푸엉시엔(扶風縣) 파먼전(法門鎭)에 위치하고 있는 法門寺는 우리나라의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한 사리신앙에 버금가는 중국의 사리신앙 도량으로 산시성의 시안(西安, 당나라 때 長安)에서 서쪽으로 11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佛指)가 봉안돼 있다. 중국 정부는 1987년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불지사리와 더불어 수천 점의 유물을 박물관과 보탑에 보존처리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즉 중국 정부차원에서 법문사를 국가 1급 보물(국보)에 해당하는 사찰로 지정해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지만 중국정부가 불지사리를 다른 유물과 달리 특별하게 관리하면서 인민들이 믿고 따르는 성보(聖寶)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법문사는 서기 300년 후한시대에 건립된 사찰로서 당나라 때는 황실에서 직접 사찰을 관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찰에 주석하는 스님이 5000여 명이 넘었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신라의 학자 고은 최치원선생이 이곳에 머물면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고하여 유명하다.
오랫동안 잊혀있다가 1981년 8월 24일, 10여일째 폭우와 천둥번개가 치고 이로 인해 법문사의 13층 팔각의 진신보탑(眞身寶塔)이 반파되어 쓰러지게 되자 1987년 대대적인 발굴을 시작했는데 바닥에 조그만 굴이 있었고, 그 굴을 파고 내려가니 돌문이 나와서 숨겨져 있던 지하궁 입구를 찾게되어 1000년이넘는 과거의 역사가 소상하게 밝혀졌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진신지문비(眞身誌文碑)’가 나오고 그 기록에 따르면 ‘인도 아쇼카왕(無憂王)때 불법(佛法)을 동쪽으로 전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불지사리)가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후 중국 황실에 의해 숭배돼 오다가 당나라때 왕궁유적 양식으로 조성된 지하궁전에 봉안했다’고 전하는데 그 장소가 법문사다. 1987년 발굴에서는 진신보탑에 묻혀 있던 불지사리 4과가 발굴됐으며 이중 세 번째 발굴된 사리는 부처님의 중지 사리로 추정되면서 전 세계 불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 불지사리(佛脂舍利)는 영골(靈骨)이라 하는데, 바로 진신사리(眞身舍利)다. 그리고 세 개는 어떤 고승의 사리인데, 이는 영골(影骨)이라 한다. 당나라 때 여덟 명의 황제가 이 진신사리를 황궁에 맞아들여 공양하였다고 한다.
지하궁전에서 발굴된 불지사리와 수천 점의 당대 보물을 1991년 살펴본 당시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은 “천하의 천금과 바꿀 수 없는 보물들”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의하면 진신사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전후소장사리'는 "앞서서 또 나중에 가지고 온 사리"라는 뜻으로 사리가 전해진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549년에 양(梁)나라 황제가 사신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를 몇 알 보내왔다고 한다. '삼국사기' 진흥왕(眞興王) 10년에도 "양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승 각덕(覺德)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냈다"라고 적고 있으니,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리가 '앞서서' 가지고 온 사리이다.
<전후소장사리>에서는 643년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그리고 사리 백 알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법문사는 복원으로 옛 모습을 찾고, 더불어 중국정부가 민간업체와 연계해 4000여 억 원을 투자해 건립한 현대식 매머드급 대도량인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에 세 번째 발굴된 불지(佛指)사리를 모셔 놓고 더불어 수천 점의 유물을 박물관과 보탑에 보존처리해 보관하면서 세계적인 불교 성지화를 하고 있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대만의 유명한 건축설계사 리주위앤(李祖原)의 설계로 산문광장, 불광대로(佛光大道), 법문사사원과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 등 4개구역으로 매머드급의 초대형 문화유적지를 조성하고 주사리 1과에 4000억원을 투자해 봉안하는 중국정부의 깊은 안목을 우리는 눈여겨 볼 일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큰 가람...
산문광장으로 가는 불광대로(佛光大道)
불광대로(佛光大道) 양 옆에 모신 불상
13층 팔각의 진신보탑(眞身寶塔)
깃털을 꽂은 신라사신
거대한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안에 봉안한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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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乾陵)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와 그의 남편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을 보고 왔다. 건릉은 산시 성 시안 서쪽 80km 지점에 있는데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스스로 황제에 등극해 백성을 탄압하는 등 독재를 일삼았다고 한다. 능을 보니 가히 놀랄만하다.
저 멀리 산과 같이 보이는 것이 능이고 고속도로 같이 넓은 길이 능을 드나드는 길이자 곧 이것조차도 능의 일부란다.
뒤를 보니 끝이 안보이는데 이 길 자체가 능이라고? 한마디로 기가 질린다.
측천무후의 無字碑, 그러나 후세에 기록을 하였다고 한다.
알현하는 외국의 16개국 사신상
측천무후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태자와 19세의 세손까지 죽였다고 한다. 태자묘의 입구가 마치 일본의 신사 모양이다. 일본이 이것을 본따 신사를 만들었나?
당나라 시절 태자묘의 관과 묘실 천정의 그림이 놀랍게도 오색 창연하다.
2000년전 당나라 때 그림이 이렇게 화려하다.
시안비림 [西安碑林(서안비림)]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문묘(文墓:孔子墓)에 있는 당(唐) ·송(宋) 시대 이후의 석비(石碑) ·법첩(法帖)을 보존한 것으로 수·당·송나라에 걸쳐역대의 명필을 새긴 1095기의 석비가 있다. 이것은 837~1090년에 걸쳐 수집된 것으로 공문서 보존의 목적이었으며 당시에는 도서관이었다.
비림은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이 황폐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문묘의 뒤에 옮기고 현종(玄宗) 황제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와 안진경(顔眞卿) ·구양수(歐陽修) ·저수량(褚遂良) ·서호(徐浩) ·몽영(夢瑛) 등이 쓴 돌비석을 그 주위에 세워 보존한 데서 비롯되었다. 명(明)나라의 성화(成化), 청(淸)나라의 강희(康熙) ·건륭(乾隆) ·가경(嘉慶) 연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당송 이후 근대에 이르는 비석을 증치하였고, 또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을 비롯한 유명한 서가(書家) 법첩의 석각(石刻)을 많이 수집하여 지금은 500여에 이르는데 보관 건물이 여섯 채나 된다. 시안 부근은 예로부터 비석이 많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파괴, 소실되었다. 다행히 비림만은 보존되어 당 이후의 서법 변천과 석비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달마대사 원본 입니다.
비문을 탁본 뜨는 모습
우리나라 에밀레 종보다 먼저 만든 중국의 종으로 특징은 보다 싶이 끝이 중근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종모양이 원형이 아니라 각이 있습니다.
역대의 중국 명필 65만 252자에 이르는 비림(碑林)의 많고 많은 비문 중에 단연 중심적 위치에 있는 현종 친필이 새겨진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에는 자식이 부모님만은 못하다는 효심에서 일부러 획을 빼서 틀리게 쓴 글씨가 있다.
대나무 잎은 알고 보니 글씨 였습니다.
시안성벽(중국어: 西安城墙)
산시 성 시안시 성구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건조한 것이다. 이후 또 수차례 중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료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 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나라 말기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졌고, 서안부를 두었다. 홍무 7년인 1374년에 서안장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장벽을 중간할 때 서, 남 양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 벽과 북쪽벽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공사는 1378년 홍무 11년까지 8년을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다. 그 후 1568년 융경 2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636년 명나라 말 숭정 9년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다. 1643년 숭정 16년 서안을 공격했고, 다음 해 1644년 이자성은 칭제를 하며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다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편집] 성벽 구조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악문(长乐门), 안정문(安定门),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눠져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다. <출처 : 위키백과>
2월 23일 화산을 갔다 돌아오다가 서안 성벽을 돌아 보았다. 만리장성과는 비교도 안되게 크고 높은 성벽과 성루와 성문을 보니 왜 중국을 대국이라 했나 실감이 난다. 땅만 커서 대국이 아닌 것이다. 또 성을 쌓은 모양새가 우리나라의 옛 성들과 닮은 점도 있지만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성 주위를 싸고 있는 해자, 성루와 성루 사이가 60M, 성을 모두 구운 벽돌로 쌓은 점 등...
길이가 무려 14Km정도에 폭 15M라니 대단하다. 당나라 때 성곽에 1/7크기라니! 북경의 자금성보다도 더 큰 명나라 때 성, 그냥 크~다 라고 밖에...
거대한 시안 성문
中國 西安 华山
2월 23일 아침 8시에 서안 이화궁 호텔을 출발하여 버스로 약 2시간을 가서 중국의 五岳之首 华山에 올랐다.
화산을 오르는 케이블카는 80위안(약14,000원)이나 내야 탈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 보니 화산을 오르는 계단이 발아래로 까마득하다.
중국의 오악중 가장 험한 화산(五嶽華山险居首)이라 써 있다.
북봉 입구에서부터 약 1시간 30분을 걸어 오운봉에 올랐다.
마치 한덩어리 같은 화산은 정말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질 않는다.
아니 도로? ^(^ 번역 프로그램을 돌렸나?
멀리 발아래로 보이는 北峰頂
안해와 인증샷을...
모든 제왕을 모신 사당(都龍廟), 도교 사당인가?
서안(西安, Xian)
중국 산시 성[陝西省]의 성도(省都).
한족(漢族) 처녀 /산시 성[陝西省]의 시안[西安]에 있는 ...
웨이허 강[渭河]의 황투[黃土] 고원에 있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수도였고 매매와 교역의 중심지이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BC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성(長安城)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로 BC 202년 지금의 시안 바로 북서쪽에 세워졌다. 왕망(王莽)의 난(9~23)에 뒤이은 혼란의 와중에 장안 성이 크게 파괴되었으므로 23년에 세워진 후한(後漢)은 뤄양[洛陽]을 수도로 정했다. 서북 변방의 이민족들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6세기에 서위(西魏)와 북주(北周)가 단기간이나마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은 수세기에 걸쳐 쇠퇴했다. 그러다가 수(隋 : 581~618)가 장안을 수도로 정하자 이곳은 다시 번성했다. 수에 이어 당(唐 : 618~907)의 수도가 된 장안은 크게 팽창하여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즉 궁성(宮城), 관리들이 거처하면서 집무했던 황성(皇城), 장인(匠人)과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던 외곽성이 바로 그것으로,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이 몰락한 후 장안은 상업 중심지이며 중앙 아시아와의 무역중개지로서 그 기능을 계속 유지했으나 점차 쇠락했다. 13세기에 중국에 왔던 마르코 폴로는 이 도시를 번창하는 교역 중심지라고 묘사했다. 현재 널리 통용되는 이름인 시안은 명대(明代 : 1368~1644) 이후에 정해졌다.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1943년에 다시 시안으로 복귀되었다. 1920년대부터 이 도시는 소련으로부터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주요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1936년 12월의 시안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이 사건으로 항일국공합작(抗日國共合作)이 시작되어, 동남 아시아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제국주의가 최후를 맞게 됨을 예고해주었다.
근대산업으로 제철소·방직공장·전기기계공장 및 비료와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이 있다. 중국 주요농업지대의 중심지로 목화·밀·차 등 농산물 가공업이 발달했다. 시안과 동해안의 쑤저우[蘇州]를 잇는 룽하이[隴海] 철도가 놓여 있으며 그밖에 몇 개의 철로가 서쪽을 향해 뻗어 있다. 시안에 있는 산시 성립박물관은 예전에는 공자(孔子) 사당이었다. 이곳은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불상 등 중요한 유물들을 모아둔 베이린[碑林]으로 유명하다. 당대에 세워진 샤오옌 탑[小雁塔], 다옌 탑[大雁塔 : 높이 45m], 다츠언 사[大慈恩寺], 명대에 건립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원래는 742년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14세기에 지어진 거대한 이슬람교 사원, 보존상태가 양호한 14세기의 성문 3개 등 흥미 있는 유적들이 많다. 자오퉁대학교[交通大學校]와 중국에서 가장 큰 과학기술 전문교육기관인 시베이공과대학[西北工科大學], 그밖에 많은 대학과 연구소들이 있다. 시안 북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진시황릉(秦始皇陵)이 있다. 이 능은 1974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전투대형으로 정렬되어 있는, 진흙으로 빚은 실물 크기의 전사(戰士) 토우(土偶)가 6,000여 점이나 발견되었다(→ 도용). 인구 8,252,000명 (2000) | 면적 9,983.0㎢ <출처 : Daum 백과사전>
4박5일로 중국 서안을 다녀 왔다. 한마디로 크다. 8번째로 중국을 와서 보고 왜 중국을 大國이라 했는지 정말 실감하고 왔다.
2월 22일 첫날
2월 22일 10시10분 인천출발 3시간여만에 서안 시간 12시20분에 서안 공항 도착
서안 공항
거대한 명나라 때 고루
진나라 때 이런 톱니바퀴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진나라 때 갑옷을 흙으로 그대로 만들어 놓은 놀라운 기술
台灣 旅行
국 명 : 中華民國
수 도 : 타이페이
위 치 : 동북아시아에 위치.
종 족 : 한족 및 원주민, 화교 등
언 어 : 만다린어,타이완어
종 교 : 불교와 도교가 대부분이며 나머지는 기독교 및 가톨릭교
시 차 : 한국보다 1시간 느림
비 자 : 한국인 한 달 동안 무비자 체류 가능(단 여권만기일 6개월 이상시, 왕복항공권소지)
화 폐 : New Taiwan Dollar(NT$)-환율1NT$=\42
기 후 : 북부(아열대),남부(열대기후),11월~3월(건기),3월~10월(우기)
전압 : 110V 또는 220V 겸용
전 화 : 대만에서 한국으로 전화 거는 방법(001-82-0을 뺀 지역번호-해당전화번호)
■ 2011년 1월 13일(목요일) 인천 10:30 인천공항3층 M카운터 23번 테이블
현지가이드 왕홍적 0911-989-234
13:00 CI161 인천국제공항 출발!! (비행시간 약 2시간 20분 소요)
중화항공
중정기념당 후문으로 입장
중정기념당 앞에서 정문을 바라보면서 중앙에서 경건하게 하기식 하는 장면을 보니 새삼스럽다. 미국 등 세계 많은 국가들이 국기 하기식을 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 선진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국기 하강식을 하는가를 말이다.
▶용산사-용산사는 타이페이의 수 많은 사원 중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타이완의 사원으로 청 건륭3년(1740년)에 지어졌으며, 그 후 많은 재해를 입으면서 몇 차례 파괴되어 지난 1957년에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사찰에 모신 주신은 복건성 진강현 안해향 용산사의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며, 문신은 공자를 무신은 관운장을 모신다고 한다. 이렇게 대만 사람들은 불교, 도교 및 토속신앙들을 복합적으로 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공부를 잘하려면 부처가 아닌 공자를 주신으로 모신 곳에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 저녁에도 신도들이 피워놓은 진한 향냄새와 연기로 자욱하고 각종 과일 등 예물을 올리는 모습과 특히 등을 접수하거나 기도를 신청하는 접수처의 창구가 여러 곳 있고, 마치 우리나라의 관공서나 은행처럼 순서 표를 뽑아 하는 대만 사람들의 종교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용산사는 화려하고 멋진 건축양식 자체만으로도 둘러볼 가치가 있는 곳으로, 대만의 전형적인 전통 건물로 앞에는 아름답고 섬세하게 용이 조각된 돌기둥 네 쌍이 있다. 특히 용산사 사찰의 지붕은 아름다운 색채와 장식을 도자기로 꾸며 매우 아름다운데 용, 봉황, 기린 등의 길한 동물로 더욱 특색을 줬다고 한다.
▶화시지에 야시장(華西街夜市)-용산사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지각색의 수많은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고 국내외 관광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입구는 북경 야시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중국건축양식으로, 붉은색 궁등을 걸어놓아 무척 특색이 있다. 먹거리 위주의 시장으로 온갖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즐비하다. 특히 뱀, 자라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마치 횟집처럼 있어 특별한 먹거리의 특색을 한껏 높여주며(한편으로는 혐오감을 주기도 하지만...), 밤이 되면 뱀을 잡거나 뱀 싸움을 보여주는 공연을 하기도 한다는데 뱀을 사진 찍는 건 주인이 싫어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으로 분위기는 떠들썩하며 타이완 사람들의 열정과 활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대추를 사 보았는데 1근에 49원을 주고 샀다. 그런데 나중에 과일 판매하는 마트에서 보니까 14원에 팔고 있었다. 바가지를 써도 한참 썼다. ㅎㅎㅎ
■ 1월 14일 금요일 自强號 열차편으로 대만 동중부 花蓮市로 약 3시간 이동
타이페이역
自强號 열차
龜山島
蘇澳 부근의 풍경
新城(太魯閣) 부근 넓은 들과 바다
▶중식후 태로각 협곡으로 (연자구, 구곡동, 자모교, 장춘사 관광)이동
타이완 동부 중앙에 위치한 화리엔시(花蓮市)는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지만 타이완의 5대 국제항 중의 하나다. 북쪽으로 쑤아오(蘇澳)로 가는 고속도로가 있고 서쪽에는 태로각(太魯閣)협곡을 통과하는 중앙횡단고속도로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부해안 관광지가 접해 있다. 또 한 이곳은 대리석으로 유명한 지방이다.
아침 일찍 우리일행 18명은 台北(타이페이)驛에서 08:50분발 自强號 열차를 타고 태로각 협곡으로 향했다. 新城驛(台魯閣)에서 내려서 협곡 입구에 다 달았을 때 많은 터널과 깎아 놓은 듯한 높은 산들은 온 몸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태로각국가공원에는 높이 3천m가 넘는 산이 27개나 있고, 대만에는 209개가 있다고 하니 2천m를 넘는 산이 없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엄청난 고산지대다. 동북아에서 최고 높은 대만의 옥산은 3,952M이고, 설산은 3,887M나 된다고 한다.
우리는 왕홍적 가이드의 안내로 2층버스를 타고 연자구보도(燕子口步道)에서 내려 도보로 약 1km 정도를 걸었다. 좁고 경사진 길을 자동차 위험을 감수하며 걸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으로 된 높은 산을 고개를 뒤로 한껏 저치고 보아야 했다. 가이드 말마따나 잘못하면 목 부러지겠다. 좁고 꾸불꾸불한 도로 아래 천 길 낭떠러지 협곡엔 석회석이 녹아 뿌연 물이 구비 구비 흐르고 있는데 고산족 원주민들이 산다는 산골짝에서 내려와 고여 있는 물은 얼마나 맑고 파란지 마치 터키석을 투명하게 표현한 듯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계곡에 놓인 출렁다리를 건너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까마득히 보이는 산속 계곡을 가로 지른 출렁다리가 또 눈에 들어온다.
이 곳 원주민들을 위해 놓여진 다리로 일반인이나 관광객은 이용할 수 없단다. 대만 정부의 원주민 보호 정책의 수준이 느껴진다. 원주민들은 아직도 저런 고산을 다니며 사냥을 한다고 한다. 산짐승이 많아 사냥하며 생긴 부락이 79개나 된다고 한다. 절벽 중간 중간에 뚫려 있는 크고 작은 동굴들은 침식작용에 의해 생긴 것으로 제비들의 서식지이다. 계곡에서 일어나는 상승기류 때문에 곤충들이 지표에 앉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기에 이것을 먹이로 하는 제비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동굴이 연자구 이다.
▶연자구(燕子口)-연자구는 태로각협곡 중 가장 좁은 곳으로 서로 마주하는 단애절벽의 간격이 겨우 16m인데 수 만년의 세월동안 폭풍우와 홍수 등으로 인한 침식작용에 의해 단애가 형성 되었다. 연자구(제비굴)는 태로각협곡의 하이라이트로 관광객은 이곳에서 내려 보행자용 길을 따라 약200m 걸으며 웅대한 태로각협곡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 도로를 처음 공사 할 때 돌을 발파하는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져 모두들 웬일인가 놀라 하늘을 보았단다. 폭파음에 놀란 제비가 공중으로 날아 오른 것이 그 수가 하도 많아 하늘 을 가렸기 때문이었단다. 그 후론 제비들을 위해 폭발물을 터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산전체가 대리석인 이 산에서 생산되는 대리석은 품질이 좋아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한다. 이 중 상당량이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캐는 옥석으로 불상 등 여러 가지 모양의 민예조각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팔아 달러를 벌어드리고 있다고 하니 타이완은 하늘로부터 복 받은 나라다. 이렇게 큰 보석산을 주었으니 말이다.
원주민 고산족용 다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는데 까마득한 산중 계곡에도 있어 놀랍다.
▶구곡동(九曲洞)-태로각협곡 경치 중 가장 아름다운 이곳은 계곡의 굴곡이 굽이굽이 이어져"구곡동"이라 이름이 지어졌다. 꼭 아홉 계곡이라서가 아니라 "九"자는 굽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곡동에 들어서면 산자수려함에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듯 하며, 굽어진 길에선 견고한 암석층만 보이나 계곡 가까이의 동굴에서는 협곡의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협곡 맞은편 대리석은 진회색에서 순백색까지 여러 가지의 형상으로 보는 이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동굴을 가로지른 도로의 거대한 공정, 구곡동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장관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꼬불꼬불한 터널이 수없이 계속되는데 협곡의 폭이 가장 좁단다.
▶자모교(慈母橋) - 계곡강을 가로지르는 전장 77m, 폭 5.1m의 다리 이름이다. 태로각협곡 도로 공사에 동원된 퇴역군인의 어머니가 매일 아들의 무사함을 보러 작업장 부근에 왔는데, 어느 날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단다. 그러나 어머니를 낙심시키지 않으려고 아들의 주검을 알리지 못한 동료들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이 죽은 것을 알고 이 자리에서 어머니도 죽었단다.
이 사연을 들은 장경국 총통이 어머니의 모성애에 감복하여 다리 이름을 자모교라 했다고 한다.
(장경국의 생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는데 여기서 장경국의 숨겨진 마음을 살짝 생각해 보기도)
자식 사랑이 하늘같은 어머니, 그들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으리라. 부모가 있었고 자식 손자를 가졌기에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 옴을 느낀다. 새삼 부모님들께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석회석과 석회석이 녹아 있는 물이 흐르는 계곡
▶장춘사(長春祠)-선로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나면 장춘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갑자기 시계가 넓어지면서 마치 중국 영화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산기슭에는 중국 전통 양식의 장춘사가 보이고, 그 아래로는 장춘폭포가 협곡을 지나오느라 긴장되었던 여행객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해주려는 듯 흐르고 있다.
이 도로는 타이완 동서를 잇는 대동맥으로 도로 자체가 이름난 관광지다. 장계석 총통 시 그 때는 공산권과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동해로 들어오는 군용 물자를 서쪽으로 수송할 통로가 없어 퇴역군인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았다 한다. 어떤 이는 죄수들을 동원했다는 말을 했다 고도 한다.
미국에서 들여 온 장비가 워낙 단단한 대리석을 깨는 대는 시험결과 불가능 하고 자연을 해치지 않으려고 인력으로 파내고 실어내고 만들었단다.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쪼고 큰 망치로 부수어 가며 길을 닦았다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워낙 험준한 난공사라 총 연장 19.2km를 공사기간 3년 9개월 18일에 사상자가 702명이나 됐으며, 그 중 사망한 사람이 212명이나 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이 횡단공로를 건설하다 순직한 212명의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 장춘사(長春祠)이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후손들이 편히 다니고, 관광지가 되어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태로각 협곡을 나와 화리엔시(花蓮)에 있는 대리석 공장에 도착, 저녁식사를 하고 타이완 원주민 소수 민족인 아미족민속공연 관람 및 대리석공장 견학을 한 뒤 화련역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도원 숙소에 도착하였다.
이 공장은 원래 개인 소유였으나 규모를 확장하고 늘어나는 수출량을 감당하기 위해 국가와 합작하여 운영하고 있다 했다.
대리석 공장 옆에 원주민 민속춤을 공연하는 장소가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원주민 무용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삶 그 자체였다. 남 녀 무용수들이 입은 옷이 화려한 색상이다. 적, 황, 청이 함께 그어진 그들 옷은 적색은 태양, 황색은 땅, 청색은 바다를 뜻한다고 했다. 그것이 곧 우주요 자연이란다.
아미족 민속춤
화리엔역(花蓮驛)에서 다시 자강호를 타고...
읽는 분들이 지루할것 같아 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