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1991년 이전에는 새로운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의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로 발전하고 있었다. 해마다 1000만 명의 서유럽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태양, 경제적 여행, 중세의 고풍스러운 정취, 아마도 나체주의의 장소 등을 찾아서 아드리아해로 왔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와의 격렬한 분리독립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2 주간의 은신처’에서 ‘전쟁으로 찢겨진 악명 높은 곳’으로 대중적인 별명이 바뀌었다. 최근에 격은 비극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의 매력은 거의 그대로이다.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던 대부분의 장소는 손상되지 않았고 전쟁 후 보수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아픈 과거는 도처에 남아 있으며 누구나 한 가지 씩 사연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크로아티아의 향기는 로비니(Rovinj)의 자갈길과 최근 재건된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의 스타리 그라드 (Stari Grad)에 남아있다. 또한 크로아티아에는 스플리트(Split)의 웅장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궁전 등 로마시대 최고의 유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날씨와 해변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훌륭하여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머무르기에 좋은 곳이다.
크로아티아 전역에 조성된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인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은 해발 600m 안팎의 깊은 숲속에 호수 16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크고 작은 폭포 100여 개가 그 호수들을 잇고 있다. 문자 그대로 ‘달력 사진 속의 풍경’이 연출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명소다.
공원 면적은 300㎢ 나 된다. 이 중에서 호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6%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숲이다. 그러나 플리트비체를 대표하는 풍경은 에메랄드빛 호수와 호수를 잇는 크고 작은 폭포다.
수천 년에 걸쳐 석회암과 백암을 통해 흐르는 물은 차례로 아름다운 동굴과 강, 폭포를 형성했다.
호수 가운데, 폭포 바로 밑으로 나무로 오솔길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아름답다. 특히 호수의 물은 투명하면서도 초록과 푸른빛이 도는데 호수 바닥에 쌓인 탄산석회 때문이라고 한다. 물의 깊이에 따라 초록색 혹은 파란색을 띠고 있다.
샌프란스시코 출신의 사진작가는 “여행은 도시, 마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살지 않지만 그곳엔 감탄을 자아내는 자연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사랑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실제로 자연의 고향이다”고 덧붙였다. <한국일보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평야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부다와 동쪽의 페스트가 합쳐진 지명이라 한다.
헝가리는 경제 개혁을 이루어 동유럽에서 부유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문화 수준이 높아 리스트 등 저명한 예술가, 작곡가, 과학자 들을 배출한 것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도시 중심에 흐르는 아름다운 도나우 강의 수려한 경관 덕분에 부다페스트는 ‘도나우의 진주, ‘다뉴브의 장미’라 불리며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도시이자 수도이다.
예정 보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다뉴브강 유람선을 타려던 계획은 허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린 덕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관광하게 되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인가? ㅎㅎ
왕궁 언덕 남쪽에 위치한 해발 235m의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본 다뉴브강과 부다페스트 야경
겔레르트 언덕 이란 지명은 헝가리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킨 이탈리아 선교사 성 겔레르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체니 다리
부다와 페스트 지구를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로 부다페스트가 탄생하는데 견인차 구실을 한 다리라고 하며, 도나우강에 있는 다리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한다. 다리 오른쪽 건너에는 성 이스트반 대성당이 보인다.
세체니 다리 왼쪽 언덕에는 어부의 요새, 마챠시 성당, 그리고 강 가까이에 있는 부다 왕궁이 보인다.
마챠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
마챠시 성당
13세기 왕궁을 건설한 벨러 4세에 의해 고딕양식으로 지어져 성모마리아 대성당으로 불리다 15세기 마챠시 왕에 의해 뾰족탑이 증축되면서 마챠시 성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화려한 색상으로 시선을 끄는 졸너이제 모자이크 지붕과 성당 전체에 장식된 섬세한 조각 작품으로 유명하다. 성당 앞에는 부다페스트 최고의 명소인 어부의 요새가 있고, 그 반대편 광장에는 페스트 기념비인 바로크 양식의 성삼위일체 원주(Szentharomsag Szobor)가 있다.
어부의 요새 (Halaszbastya)
1895 ~ 1902년 부다 성의 한쪽 벽에 네오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것으로 요새에 있는 7개의 하얀탑은 파노니안 산맥에 정착했던 마자르계의 7부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은 중세시대 이 지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던 어부 조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요새 입구에 말을 타고 있는 청동상은 헝가리의 초대 성왕 이슈트반1세 이다.
요새에서 다뉴브강 야경을 배경으로......
요새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다뉴브강 야경
요새의 야경
마챠시 성당의 화려한 색상으로 시선을 끄는 졸너이제 모자이크 지붕과 성당 전체에 장식된 섬세한 조각 작품
어찌 이런 이상한 표정을......
영웅광장
헝가리 정착 1000년을 기념해 1896년에 만들어진 광장 한복판에는 기념비가 우똑 솟아 있다. 기념비 꼭대기에는 가브리엘상이 있고 아래쪽에는 6명의 부족장 기마상이 있다. 그리고 뒷쪽에는 헝가리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동상이 있으며 광장의 양쪽에는 미술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영웅광장의 미술박물관
Brahms: Hungarian Dance No. 5 / Abbado · Berliner Philharmoniker
유네스코 최초로 자연및 문화유산에 선정된 폴란드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을 보고, 오후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본 후 곧바로 버스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났다. 원래는 크라코프에서 자고 아침에 출발해서 타트라를 관광하며 헝가리로 가서 오후에 부다페스트를 관광하려 했던 일정이었는데 사고로 인해 이제는 국립공원 '타트라'를 그냥 지나가면서 버스에서만 보게 되었다. 타트라(2,663m)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에 걸쳐 있는 알프스 산맥중의 하나 라고 한다. 동구의 알프스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타트라 산맥의 절경을 감상 하면서 6시간여(보통 4시간 30분정도 걸리지만 길이 막혀서...)를 달리고 다리며 바라본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주변의 경관이 너무도 아름답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와 타트라로 가는 폴란드의 전원풍경
폴란드의 조그만 비행장, 야전 군용 비행장 같은 모습이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폴란드의 아름다운 마을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는 흰눈이 쌓인 아름다운 산이 보인다.
드디어 멀리 아름다운 알프스산맥이 보인다.
슬로바키아(SLOVKIA)의 타트라국립공원은 해발 2천메타에서 시작되는 산맥으로써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4월말까지 눈이내리며 산 정상은 만년설로 웅장함을 자랑하고, 눈 덮힌 도로옆에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 있는 나무들은 하늘이 만들어 낸 무공해 자연이다. 특히 자연설이 있는 타트라국립공원엔 스키와 산악자전거맨이 행렬을 이룬다. 그리고 이 웅장한 눈산은 유럽의 캠프장 역활을 하고 있다.
신기한 모습의 새털 구름
차창으로 보이는 너와집
타트라의 고성이 있는 마을
타트라 국립공원의 스키장에는 아직도 잔설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주위에는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서 있다.
우리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고속도로가 아닌 좁은 지방도를 이용하다가 공사 등으로 길이 정체되어 더 늦고 말았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비극의 현장이자 영화"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인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그 시설 그대로를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폴란드 명은 오슈비엥침(Oswiecim)이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힘러의 명령아래 나치스 친위대(SS)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나치는 오슈비엥침의 유태인 제1수용소가 수용인원이 넘치자 이곳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독일식 표기는 비르케나우)마을에 제1수용소의 10배 가량의 브제징카 제2 유태인수용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관광 안내자료에서>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코스라 돌아 보긴 했지만, 섬찟하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는 어찌보면 한많은 영혼들의 울부짓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만 같은 곳으로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박물관이다.
아우슈비츠수용소 박물관에서 입장권을 발급받는 동안 기다리는 일행들......
아우슈비츠에서 점심 식사를 한 식당 내부 모습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는 기만적인 나치의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제1수용소 건물들은 빨간 벽돌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용소 철조망은 2중으로 되어 있고 전기가 통하게 되어 있어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다. 우리 나라의 휴전선 철조망과는 비교도 안되게 철저하게 되어 있어 이곳에 들어온 수용자들은 단 한명도 살아서 나간 사람이 없단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는데, 약 150만명이 이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 처형당한 장애인들의 의수족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의 머리털로 짠 담요라고 하니,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민다.
당시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러시아군이 먼저 폴란드에 들어 왔을 때, 발견된 여자 머리카락이 3톤이었고 보통은 6~7톤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독일군은 이 머리카락으로 군용모포를 만들어 각 군부대에 보급했다고 한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안경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이 소지 했던 구두약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이 소지 했던 머리빗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의 신, 너무도 엄청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어린이들의 옷, 그러니까 어린이들까지 모두 처형했다는 증거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이 맏겨 놓은 가방들, 나갈 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가방에 이름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럽의 중심이라고 소개하는 가이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의 기록사진들이다. 그 당시 나치가 사진 찌어 놓았던 것을 폐기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곳 말고는 모든 수용소를 파기시켜서 흔적을 없앴다고 한다. 잔인무도한 나치, 그들도 후일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브제징카(독일식 표기는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손으로 가리키는 가이드 아우슈비츠의 10배 규모이며 제2의 아우슈비츠이다. 이 곳의 입구는 '죽음의 문'이라고 불렸으며 열차 노선이 끝나는 부분에 '국제 위령비'가 있다.
그 유명한 나치가 개발한 가스는 한 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하니 이 깡통만 보아도 짐작이 가고 기가 막힌다.
이 죽음의 가스실 앞에는 세척실이라고 쓰여 있었고, 입구에서 2인당 비누 한개씩을 나누워 주었다고 한다. 들어 가는 사람들이 씻으러 가는 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가스실에서 처형한 시체들은 이곳 화장장에서 소각시켰다고 하는데, 소각 시설이 여러개 있었으나 굴뚝은 한개이다. 이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당시 수용소 담장에 쳐진 2중의 전기철조망과 망루, 수 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원망과 통한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을 철조망을 보니 분노와 함께 소름이 끼친다.
수용소 내에서 죽은 유대인이 150만명, 기타 정치범 등 유럽인들을 포함해 600만이라는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