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7일

파노라마 1453 박물관을 돌아 본 다음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인 블루 모스크를 구경하다. ^^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Blue Mosque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지시 아래 건축가 시잔의 제자인 메흐메트 아아(Mehmet A?a)가 1609년 착공을 시작해 1616년 완공했다. 아야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원에는 4개의 미나레가 있지만, 블루 모스크는 6개의 미나레를 가지고 있다. 아흐메트 1세가 ‘황금(알툰)’으로 만들라고 했는데, 건축가가 ‘6개(알트)’로 잘못 알아들어서 6개의 첨탑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미나레의 높이와 개수는 술탄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에 정말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 이슬람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메카의 미나레도 6개였기 때문에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사람들이 꾸며 낸 이야기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내부의 벽과 돔은 21,043장의 푸른색과 흰색의 이즈니크 타일로 꾸며져 있고, 250개가 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들어와 화려하게 빛난다. 화려한 푸른색 타일 덕분에 ‘블루 모스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현재는 원래 명칭인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이라는 말보다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슬람 신자들은 일생에 한 번쯤은 메카에 대한 성지 순례를 해야 하는데, 블루 모스크는 성지 순례의 출발지가 될 정도로 중요한 사원이다. 술탄들은 중요한 종교적 선언 시에 이 사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블루 모스크 앞 분수의 동쪽에 있는 돔 건물은 쉴레이만 대제의 비인 하세키 휴렘(Haseki Hurrem)이 1556년에 건설한 욕장 하세키 휴렘 술탄 하맘(Haseki Hurrem Sultan Hamami)이며, 블루 모스크의 입구에서 나와 아야소피아로 가다 보면 왼편으로 술탄 아흐메트 영묘(Sultan Ahmet Turbesi)를 볼 수 있다.<다음백과>



파노라마 1453 박물관에서 나와 블루 모스크로 가며 성벽을 보니

벽돌로 축조된 아름답고 견고해 보이는 터키의 옛 성곽이다.

  














오벨리스크, 세상의 중심? 배꼽...^^


블루 모스크 앞의 길쭉한 터인 히포드롬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고대 검투 경마장 터이다. 콘스탄티누스 시절에는 검투 경기 대신에 마차 경기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경기장은 10만 명 정도 수용할 수 있으며, 중앙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기둥이나 조각상 등이 있고, 밖으로는 트랙이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는 ‘니카의 난’이 일어나 처형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오스만 시대 때는 예니체리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곳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13세기 십자군의 침입 등으로 인해 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는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비잔틴 양식의 받침 위에 놓여 있고, 3,500년 전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에 있는 뱀머리의 기둥은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으로, 479년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무찌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뱀 세 마리가 서로 뒤엉켜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뱀의 머리 부분과 상단 부분이 파손되어 현재는 뱀의 몸통 부분만 남아 있다.

가장 북쪽의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에 만든 오르메 수툰(Orme Sutun)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벨리스크이다. 10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원래 청동으로 덮여 있었지만, 십자군들이 동전을 만들기 위해 가져가면서 없어졌다. 받침 또한 히포드롬 광장보다 몇 미터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받침에는 경마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광장 북쪽 끝에 있는 둥근 지붕을 가진 체슈메(Cheshmeh)는 19세기 말에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선사한 것이다.<다음 백과>









Mozart - Piano Sonata No. 11 in A major, K. 331 - I. Andante grazi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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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8일

터키 마지막 날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 보았는데... ^^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Dolmabahce Sarayı
보스포루스 해협에 자리 잡은 화려한 궁전, 돌마바흐체 궁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궁전이다. 19세기 중엽인 1843~1856년에 술탄 압뒬메지트 1세(Abdulmecit I)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에는 원래 톱카프 궁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너무 비좁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새로 세운 것이다.

궁전에 들어가면 우아하고 장중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홀이 43개, 방이 285개, 발코니가 6개, 목욕탕이 6개나 되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접견실인 황제의 방은 56개의 기둥과 750개의 전등이 달린 4.5톤의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어 대단히 화려하다. 계단의 손잡이 받침대가 베네치아제 크리스털로 된 계단의 방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인테리어와 장식은 모두 유럽에서 가져온 것이고, 유럽의 명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궁전은 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숨을 거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업무 도중에 이곳에서 사망하였는데, 궁전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9시 5분에 멈춰 있다. 그가 사용하던 서재와 침실 등을 이 궁전에서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관람은 가이드 투어로만 가능한데, 가이드 투어는 터키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있으며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는다. 관광객은 세람릭(Selamlik : 남성의 거처)과 하렘릭(Haremlik : 여성의 거처)을 모두 둘러보게 된다.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을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때문에 되도록 시간적 여유를 두고 방문하기를 권한다.<다음 백과>









참 아름 다운 궁전이었으나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어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길 수없어 아쉬웠다. ㅎㅎ



Mozart - Piano Sonata No. 11 in A major, K. 331 - I. Andante grazioso


2019년 11월 7일

트로이 유적지를 관람하고

차나카레 라프세키(Lapseki)) 항에 도착하여

카페리에 올라 마르마라(Marmara)해와 에게 해 사이의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겔리볼루(Gelibolu)) 항에서 하선하여 이스탄불로 가다.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성을 공격하는 오스만 제국 슐탄 메메드 2세 등을 재현한

파노라마 그림 박물관 
 


파노라마 1453 박물관은 1453년 5월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드 2세가 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박물관이다.

돔 양식의 박물관은 누워서 보면 바닥에서 천장 끝까지 다 보이는 양식으로 둥그렇게 하늘을 그리고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어 1453년 이슬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전을 사방팔방으로 그려 재현했다. 참 대단하다. 음향 효과까지 있어 마치 전쟁터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ㅎ~



1453박물관 입구



터키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역사 박물관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1453 파노라마박물관은 과거 오스만터키가 콘스탄틴노블을 1453년 점령할 때를 상상하여 2009년에 돔 건물에 그림으로 표현한 박물관이다. 초기 오스만 터키인들은 우랄알타이 산맥에서 살았던 유목민으로 몽고족의 집 처럼 둥근 천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상의 집을 연상할 수 있도록 돔 형태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박물관 그림은 골든혼에 배를 집어넣기 위해 산으로 70척의 군함을 옮긴것과 성벽, 공격 루트등이 그려져 있고, 콘스탄틴노블을 점령 할때를 그림으로 표현 하였다. 지금 터키 국민들은 오스만 터키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림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이지만 그림과 음향 효과 뿐 유물은 없다. <터키 이스탄불 파노라마 박물관_작성자 채약산 참고>














박물관을 관람한게 아니라

아이맥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기분이다. ㅎㅎ



Turkish March Mozart - Rondo Alla Turca

2019년 11월 7일

아이발륵의 Halic park hotel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약 2시간 30분여만에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로 유명한 고대도시 트로이 (Troy) 유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로 유명한 고대도시 트로이 (Troy) 유적지 입구

너무 이른가? 기념품 가게가 몇 곳만 문이 열려있다. ^^

 




                                  무화과나무


트로이 (Troy)

 

트로이는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km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에 있었다. 트로이의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졌으나,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였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주거지가 파괴되어 버린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백과>




살구나무





트로이의 목마 <Trojan horse>

 

뛰어난 목수이자 권투선수였던 에페이오스가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철수하는 체하고 근처의 테네도스 섬에 정박하고 있었다. 뒤에 남은 시논은 트로이인들에게 이 말이 트로이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든 아테나 여신에게 받치는 제물이라고 말했다. 라오콘과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이 말을 성 안으로 들여놓았으며, 이 말 안에 들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그날 밤 성문을 열어 그리스군을 들어오게 했다.

이 이야기는 〈아이네이스 Aeneid〉 2권에 자세히 나와 있고, 〈오디세이아 Odyssey〉에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다음 백과>

이름만 유명했지 장난감 보는 것 같아서리 별 감흥이... ㅎㅎ



2019년 11월 6일 쉬린제 마을에서

소아시아의 중심 고대도시 에페소로 가다. ^^





에페소 유적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세워진 도시로서 에게 해로부터는 약 6.5km 떨어져 있다. 에페소는 신약 시대에 로마제국의 도시들 가운데 손꼽힐 정도로 큰 도시로서 소아시아에서 정치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주재 로마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에페소는 또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 활동과 관련해서도 큰 의미를 지닌 도시이다.

에페소라는 도시가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에페소는 기원전 1044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정복으로 20개 도시로 구성된 이오니아 동맹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이 도시는 차례로 리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에페소는 해양 무역을 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주요 무역로로 통하는 간선 도로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그리고 상업과 재정의 중심지로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이었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이 신전은 에페소에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준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신전을 방문하려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에페소를 찾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장인들은 신전 모형이나 기념품들을 만들어 팔았으며 숙박업자나 음식업자들의 영업 활동도 대단히 활발했다. 에페소인들은 에페소의 다이아나라고 새긴 동전을 발행해 아르테미스 숭배를 촉진하기도 했다. 신전 외에도 에페소에는 25,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 공중목욕탕, 체육관, 도서관, 시장, 광장, 상업과 행정 사무소 등 여러 건축물과 문화 시설이 있었다. 극장과 항구를 잇는 큰 도로도 유명했는데 이 도로 양쪽에는 높은 원형 기둥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 에페소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사상에 물들어 있고 마술 같은 것들도 성행하던 에페소에서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기적을 행하고 성령의 세례를 베풀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난 후에도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 당부한 모습을 보면 그가 에페소 교회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바오로 이외에도 에페소 공동체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아폴로, 티모테오, 티키코스, 오네시포로스였다. 에페소 교회에 전해진 복음은 주변의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 콜로새 등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워지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약 성경에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서간이 실려 있는데, 이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나약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인내한 에페소 교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 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사도 요한은 1세기 말경 에페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출처 다음백과>


 아쉽게도 우리말은 없군요. ^^

2015년 유네스코 인류유산으로 지정된 에페소는 입구에서부터 아고라행정관, 시청사터, 시의회격인 오데온과 트라이아누스의 샘, 폴리우의 우물, 도미티아누스신전, 히드리아누스 신전 등이 이어지고 니케여인상, 뫼미우스기념비, 바리오목욕장, 공중화장실, 쇼핑몰로 시작되는 쿠레티의거리를 내려가면 유명한 셀수스도서관이 나오고 북문쪽으로 나가면 25,000명까지 수용가능한 원형극장이 나온다.



바리오 목욕장 - 온탕, 냉탕, 사우나, 탈의실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고... ^^


상.하수도관


오데온(Odeon) - 의회 회의도 하고 연주회등도 하는 문화 공간으로 1,500명을 수용가능하다고 하며 지붕도 있었다고...^^







승리의 여신 니케(Nike)


나이키는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따온 이름이고, 로고는 여신의 옷자락 문양을 본뜬 것이라고...^^


대리석으로 된 길


트라이아누스의 샘 - 도시민들이 먹는 수돗물을 담아 놓던 곳이라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무늬 바닥




하드리아누스 신전 문

2세기 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앞쪽에는 운영의 여신 포르투나가, 뒤쪽에는 저주의 여신 메두사가 새겨져 있다.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여신이었으나 여신 아테네의 저주를 받아 머리 카락이 흉측한 뱀으로 변한 괴물이 되었다는데,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사람들이 보고 싶도록 유혹하는 얼굴이다.<인터넷에서...>


공중 화장실


대리석에 U자 형으로 구멍을 냈고 변기 밑에는 정화조 시스템과 연결되어 짧은 시간내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처리되었다.

변기의 앞부분에 물줄기가 흘러서 용변후 물을 이용해서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겨울에는 귀족들이 용변을 보기 전에 하인이 먼저 들어가 앉아 차가운 대리석을 따뜻하게 한 다음 사용했다고...


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하는 셀수스 도서관 ^^



안내표지


셀수스 도서관 입구에 있으며 건너편 유곽으로 가는 입장객은 이 발사이즈보다 커야 갈 수 있으며,

유곽에 누가있고, 대금 결제 수단 등을 알려주는 안내문 이라고...^^










원형 극장


2,000년전 지어진 25,000명 수용 가능한 대형 극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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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6일 파묵칼레에서 조식 후 포도주 마을로 유명한 쉬린제 마을로 가다. ^^



험한 산길을 구비 구비 돌아 쉬린제에 도착했는데 

식당과 매점 한 곳이 있을 뿐 잠시 둘러본 마을은 아주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왜 이런 곳을......아마도 포도주를 팔기 위한 여행코스인 듯 싶다. ㅎㅎ












Love Is Just A Dream (사랑은 꿈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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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5일 안탈리아에서 파묵칼레로 가다. ^0^



히에라 폴리스 유적지


히에라 폴리스는 BC190년 페르가몬왕국의 유메네스2세가 세운 성스러운 도시로

로마를 거쳐 비잔틴시대 까지 번성하였으나, 셀주크 투르크에 정복당하고 14세기 A·D 60년 대지진으로 페허가 되고 말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이기도 한 파묵칼레(Pamukkale)는 

온천수에 의해 이루어진 곳으로 터키인들이 '목화의 성(Cotten Castle)’. 파묵(목화), 칼레(성)에 담긴 의미인 '파묵칼레' 라고 이름 붙인

고대의 히에라 폴리스(Hierapolis)이다.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어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고,
이 도시의 전성기는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 폴리스는 그리스도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어 그리스도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 도시의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즐리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해 셀추크-오스만 터키시대에는 아무도 이 지역에서 살지 않았다.

 

  로마 시대 15만 명이 거주를 하였던 대도시 히에라 폴리스(Hierapolis)는

터키 남부 데니즐리주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와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에서 로마 편을 들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이 도시를 얻게 되자

페르가몬의 시조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의 이름을 따서 히에라폴리스라고 도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1세기 초에 지진이 있었으나, 2~3세기에는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의 중심지로 변하기도 하였지만

1354년 격렬한 대지진이 일어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인근 데니즐리로 모여들게 되면서

이곳 히에라폴리스는 폐허가 되었고,

또한 이 지역에 석회성분의 물이 계속 솟아져 나와 침전 층이 만들어져 유적들을 덮음으로써

히에라폴리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

[출처] 목화성인 파묵칼레(Pamukkale)와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작성자 뫼벗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il teatro, the theatre)



히에라 폴리스 il teatro, the theatre




지중해 해국





천년바위 (산조대금 5관청 조재수)


2019년 11월 5일 안탈리아에서 파묵칼레로 가다. ^0^



'목화성'이란 뜻을 가진 파묵칼레의 새하얀 눈이 덮힌 것 같이 아름다운 석회붕과 노천온천



파묵(Pamuk)은 터어키어로 목화의 뜻이고, 칼레(Kale)는 성이란 뜻으로

경사면을 흐르는 온천수가 빚어놓은 계단식 결정체가 장관을 이루며,

 석회성분이 다량 함유한 온천수가 수세기동안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와 귀족은 물론, 크레오파트라가 결혼하고 찾아와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0^



마치 북극의 빙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석회붕의 경이로움......^^





자연이 빚어 놓은 명품 디자인......^0^


















파묵칼레 온천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이다.

지면에서 뿜어 나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섭씨 35도 온천수가 100m 높이 산 표면으로 흘러나오고,

흘러 넘친 석회물은 크림색의 종유석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아름다운 석회붕과 노천 온천을 만들었다.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심장병, 순환기 질병, 고혈압, 신경성 장애, 류머티스, 눈과 피부의 질병,

신경과 육체의 피로, 소화기 질병, 그리고 영양 장애에 효능이 있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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