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고조(宗高祖)묘재(墓在)에 관한 이야기

 

 

 

  집안의 뿌리, 즉 그 집안의 來歷과 歷史를 말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先祖님들의 山所(墓)를 찾지 않고는 敢히 論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家門의 자랑을 하기에 앞서 族譜도 管理하지 못하고, 가까운 先祖님의 山所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하기는 어찌하다가 너무도 家庭이 貧困하여, 특히 長孫이 어렵게 살다보니 先祖님들의 山所도 돌보지 못하고 게다가 族譜마저 火魔에 빼앗겨 이제는 그 뿌리마저 疑心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2001년 가을 10代祖이신 종고조(宗高祖, 字 俊伯 肅宗壬戌五月十八日生 甲寅進士官通政大夫尙州牧使己亥十月初四日卒墓在尙州郡牟西面可幕里後麓酉坐原)산소를 찾아 故鄕 忠北報恩郡懷仁面艾谷二里(上甫古室)高和發高介에 移葬하여 모시니 그나마 千萬多幸이라 생각된다.

이에 27世.廣錫 再堂叔님의 回顧錄을 올려 그간의 우리 집안의 어렵고 부끄러웠던 일들을 돌아보고 다시는 後孫들이 이같은 부끄럽고 죄스런 일 없이 선조님들을 잘 모시며 家門의 榮光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廣錫님의 回顧錄>
“波瀾萬丈한 人生 77年 稀稀壽를 살면서 단 한 가지도 남기고 갈 것이 없다. 日 祖上님들의 威信事業에 協助하였다는 것뿐이다. 至今으로부터 45年前인 1957年 炳熙(字 鳳煥)祖父님께서 孫子인 나(廣錫, 당시 32세로 10月에 除隊하여 歸鄕)를 불러 懇曲하게 이르시기를 慶尙北道 尙州郡 牟西面 可幕里에 尙州牧使로 계셨던 너희 9代組 할아버지 兩位분 산소가 있으니 꼭 산소를 찾아 時祭를 지내도록 하라는 遺言을 하시면서 산소에 가지 못한 事緣도 함께 말씀하셨다. 事緣은 이러 했다. 先代 祖父님들 께서는 말(馬)을 타고 時祭를 다니셨으나 祖父님代에서는 家勢가 어려워저 걸어서 往復 5日이 걸려 다니다 보니 旅費도 만만치 않아 도저히 해해연연(每年) 못 다니게 되셨다고 한다. 그러다 5~6年間 時祭를 못 갔는데 尙州 할아버지 산소를 관리해주는 분(산지기)이 찾아와서 동내(가막리) 張家놈들이 우리 산을 세부 측량하여 張家들 산으로 해 놓았으니 어르신께서 가막리에 가 보셔야하겠다고 하여 祖父님께서 가보시니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明治 44~5年 原因無效訴訟을 提起하여 山을 도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祖父님께서는 많은 채무를 갚기 위해 종종 兄弟분들에게 協助를 要請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하는 수 없이 可幕里에 있는 山을 賣却하여 債務를 整理하셨다고 한다. 그 후 1年이 되었을 때 산소를 관리해주시는 분이 와서 가막리 張家놈들이 尙州牧使 할아버지 산소의 石物을 넘어뜨리고 碑石을 부수어 둠벙에 집어 넣었다고 하여 祖父님께서 가보시니 사실이었으나 束手無策이라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祖父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꼭 銘心하여 이 할아버지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끝내셨다.
그 후 나도 對策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 차에 20여년전 報恩에 엄청난 水害가 있어 復舊事業을 하던次에 동생(參錫)에게 이야기 했더니 찾아가 보자고 하여 동생 트럭을 타고 尙州郡 牟西面 可幕里로 달려갔으나 墓地의 誌石이나 표시물이 없으니...
날도 저물고 해서 동네에 차를 세워 놓고 있노라니 한 사람이 오고 있어, 동네 아무 사랑이라도 좋으니 하룻밤 유할 수 있겠느냐 했더니 “상주가 가깝고, 차도 있는데 旅館으로 가지 왜 이 동네에서 쉬냐”고 하여 뭘 좀 수소문 할 것이 있어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럼 우리 집으로 갑시다.”해서 그 집으로 가서 서로 通姓名을 하고 보니 姓氏가 張氏 였다. 그래서 張先生 이 동네에 옛날 尙州牧使를 지내신 徐氏 묘라고 하며 石物도 쓰러지고 묵는 묘가 혹시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張氏 하는 말 “돈을 얼마 주실라오?”하기에 “우리 宗中에서 하는 일도 아니고 내 형제가 하다 보니 많이는 못 드리고 30萬원 드리지요.” 했더니 “先代 祖上墓를 찾는 사람들이 돈 30萬원이 뭐요”하며 말문을 막는다. 해서 동생이 밖으로 나가 얼마 후 돌아오더니 “형님 그만 잡시다.”하니 張氏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 동생이 할아버지 산소를 찾았다고 하여 물어보니 동생이 그 사이 張氏네 內室로 가서 아주머니한테 諒解를 구하고 承諾을 얻어 상세하게 물어 보았더니 아주 세세히 알려 주시더라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張氏가 와서 “徐主事”하고 불러 왜 그러시오. 했더니 “산에 갑시다.”하여 따라가 보았더니 祖父님 遺言 대로 틀림이 없어 잔 올리고 돌아와 당숙(정모, 정택)을 모시고 가서 今草를 하고 왔으나 역시 또 束手無策이던 次에 우리 宗中에서 故鄕 忠北 報恩郡 懷仁面 艾谷二里(上甫古室)高和發高介에 移葬하여 모시니 우리 長孫婦에 功이 제일크고 長孫인 영수(明知大敎授) 內外가 장하며, 故 범석 형님 내외분께도 고맙게 생각하고, 또 무엇보다도 동생(삼석)의 勇斷은 100人至上이라 생각한다.” 以下 省略

 

 

 

 

 




P 워나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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