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丘達城徐氏 行列表

14세 약봉 충숙공(藥峯 忠肅公) 이후

15세

景 O

경치 경

29세

東 O

동녁 동

16세

O 履

신 리

30세

O 德

큰 덕

17세

文 O

글월 문

31세

O 逵

길 규

18세

宗 O

마루 종

32세

O 鎭

진압할 진

19세

命 O

목숨 명

33세

永 O

길 영

20세

O 修

딱을 수

34세

O 榮

꽃 영

21세

有 O

있을 유

35세

O 烈

세찰 렬

22세

O 輔

도울 보

36세

世 O

대 세

23세

O 淳

순박할 순

37세

O 善

착할 선

24세

相 O

서로 상

38세

O 浩

클 호

25세

光 O
丙 O

빛 광
밝을 병

39세

桂 O

계수나무 계

26세

載 O
廷 O

실을 재
조정 정

40세

O 慶

경사 경

27세

O 錫

주석 석

41세

基 O

터 기

28세

O 源

근원 원

42세

O 鏞

종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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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달성서씨라고 했다가 대구서씨라고 하는지 설명하죠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래서 대구달성서씨 라고 부르더군요 

대구서씨(大丘徐氏) 본관

우리 대구서씨들은 옛날부터 본관을 대구와 달성으로 혼용하여 다 같이 쓰고 있었으니 대구서씨라고 해도 달성서씨라고 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호적에 본관이 달성으로 되어 있음)

우리들의 호적에도 대구서씨로 한 집도 있고 달성서씨로 한 댁도 있는데 그 까닭은 조선조 말 우리나라의 호적법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호적을 계출할 당시에 본관을 대구로 한 집은 대구가 본관으로 되고 달성이라고 한 집은 본관이 달성으로 된 것입니다.

애당초 처음에 어떻게 해서 관향을 대구와 달성으로 쓰게 되었나 하는 그 원인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이르기를

대구는 별칭이 달성이며 신라 때에는 달구, 화현이라고 하였고 그 뒤에는 수창군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를 두었는데 달성은 대구부의 서쪽으로 4리가 된다고 하였고 석축으로 성이 쌓여 있으며 그 석축의 주위가 944척이나 되는데 그 안에 우물이 셋이 있고 연못이 셋이 있으며 천연적으로 군수창이 되고 성이 되어 있으나 폭과 주위가 협소하여 성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으며 지금은 인가는 없고 다만 옛 관청이 건물이 섰던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지금의 대구직할시에 있는 달성공원인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양측 옆과 뒤가 성과 같이 쌓여 있고 앞으로만 내다 보이는 것이 삼테기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달성은 대구의 고호이며 별칭이기에 옛날부터 우리들의 선조들께서도 대구와 달성을 다 같이 관향으로 써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이 관향에 대해서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가 뭔고 하니 대구서씨라고 하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에 달성서씨라고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왜냐하면 달성서씨라고 하는 서씨가 우리들 말고 따로 또 한 씨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죠


달성서씨 판도공파 (達城徐氏 版圖公派)

우리 달성서씨 중에는 우리들과 시조를 따로 하는 판도공 후손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판도공파라고 하며 이들의 시조는 판도공입니다. (이들이 달성서씨라고 하지요)

판도공의 휘자는 나라진(晉)자이시고 고려 때에 판도 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이 판도공의 후손들도 우리 소윤공의 후손들과 함께 대구지역에 같이 살면서 관향도 대구와 달성으로 다 같이 하였었으며 이들 판도공파의 족보도 처음에는 우리 대구서씨의 창간 보인 임오보부터 우리 족보의 별보 즉 부록으로 수록하여 오다가 영조대왕 13년 서기 1755년에 그들대로 제자(題字)를 달성서씨세보(達城徐氏世譜)라고 하는 을해보(乙亥譜)를 창간하여 펴냈으며 종회를 구성하여 달성서씨 대종회라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소윤공의 후손인 우리 대구서씨와는 완전히 분류가 되어 수 백년을 지내온 지금 우리가 그냥 달성서씨라고만 한다면 소윤공의 후손인지 판도공의 후손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족보를 처음 창간보부터 제자를 대구서씨 세보로 하여온 우리 소윤공의 후손들은 가급적이면 관향을 대구로 일관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향을 달성이라고 한다 해도 망발되는 것은 아닌 것이니 관향을 대구라고 하든 달성이라고 하든 간에 달성서씨 중에 판도공 후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휘 (諱) 란 무슨 글자인가?

그리고 여기에는 잠깐 참고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좀 전에 드린 말씀 중에서 판도공의 휘(諱)자는 나라진(晉)자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이 휘자라고 하는 그 휘자의 뜻을 잘 모르는 분들이 간혹 많이 있습니다.

이 휘자라고 하는 휘자는 죽은 이 이름 휘(諱)자로써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말할 때에는 휘자가 무슨 자와 무슨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판도공의 휘자는 나라진자로 외자 이십니다. 이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인데 더러는 우리 시조의 함자가 이문한(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살아계신 분들의 명함을 말할 때에는 명함 함(啣)자인 「함자」라고 말하며 돌아가신 분들의 명함을 말할 때에는 「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행복가득한곳♡
글쓴이 : 예쁜아지 원글보기
메모 : 조상님의 기록 모셔 갑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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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24일

강남시니어클럽에서

시험감독관으로 함께 활동하는

일가로 부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다.




 

우리집 제례 가풍

  

 

우리집은

'글방할아버지'라고 불리었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윗대조 때부터 진설하였던 법을 전수해 주시어

아버지께서는 젯상을 차릴 때

늘 左東右西를 말씀하시며

성균관에서 발표하는 것과 달리

위와 같이 진설을 하셨습니다. ^^

 

 

<강남구청뉴스지 2017년 02호에서 발췌 >

 

 

강남구청뉴스지에 소개된 큰절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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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신사임당에 비견되는 자녀교육의 모범 정경부인 고성이씨
2012.09.20 03:29 등록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은 국보(5)와 보물(35) 사적(2)등 국가지정문화재(76)와  도지정문화재(132)등 총287점의 문화재가 산재한 세계역사도시이다. 또한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진입하다가 좌측에 보면, 보물 182호인 임청각과 국보 16호인 신세동 법흥사지 7층전탑(法興寺址七層塼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85호인 고성이씨 탑동종택이 있다. 이곳의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났다.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이상룡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고성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황(李璜)은 고려때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아 고

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칠세(七世)  이존비(李尊庇,  1233~1287)가 진현전(進賢殿) 대제학(大提學)(현 대학교 총장 격임)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이존비의 손자 행촌(杏村) 이암
(李嵒, 1297~1364)은 원나라의 농서인『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또한 서예에 능하여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盟頫)의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이암(李癌)의 아들인, 이강(李岡)은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장인(丈人)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초기의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강의 아들이자,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이다. 이원의 일곱 아들(대, 곡, 질, 비, 장, 증, 지)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 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 이 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주가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이곳 임천각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함재 서해(涵齋 徐懈, 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다. 이 사람이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 고성이씨 부인이다. 서성의 외조부인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는데, 외동딸은 어릴적 홍역을 앓으면서 불행하게 눈이 멀게 되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서해는 장가를 들기 위해 고성 이씨 댁으로 향하던 중 주막에서 주모의 기절초풍할 말을 들었다.

 

“신부가 맹인인데 참으로 신랑이 아깝다”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신랑측은 즉시 파혼을 하고 돌아가자고 했으나, 도학자인 서해는 “이미 사주단자도 보냈고 장님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맹인인 처녀에게 장가들겠는냐” 며 반대하며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서해의 쉽지 않은 이 선택은 결국 대구서 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되었다. 고성이씨는 비록 맹인이었으나 재색과 학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서해는 처가에서 물러 준 소호헌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면서 행정인 달인인 서성을 낳게 되어 손이 귀한 집안에 경사가 낳다. 현재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보물 475호인 소호헌에는 약봉태실이라는 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서해가 23세 되는 해 서성이 2세가 되던 해 1559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졸지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 고성이씨는 낙담했으나 외동 아들인 서성을 잘 키우는 것만이 요절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 생각하고 자식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맹모삼천지교’와 같이 서성의 숙부 서엄이 있는 한양의 약현(현재 서울시 중림동)으로  1560년 이사를 결심한다. 이런 결정은 교육적인 환경과 학맥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에는 연산군 이후 잇단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에서 태생지도 중요하지만 성장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

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여자의 사주팔자에서 직관력과 자식을 상징하고 음식솜씨 등의 재능은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으로 표현하는데, 아마도 고성 이씨가 식신과 상관이 발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성 이씨는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대지 오천평에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짓는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들인 약봉과 이씨 부인 단 둘에 불과했다.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개인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큰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십년 가지 아니해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내가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내 제삿날을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들인 서성은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까지 올랐고, 그녀의 손자이자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과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고성 이씨 사후에 특히 손자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 증손 15명, 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450여 년 전 이씨 부인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은 오늘날 가문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모

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인물열전의 저자 혜명 류동학 선생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과 대전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과 대전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영동방송(강원)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매일신문(대구)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등 각종 매체에 다수의 저작을 연재했으며, 현재 대구 영남일보에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을 연재 중입니다. ―편집부


혜명 류동학 


 

대기원신보 : http://www.epochtimes.co.kr/news/view.html?smode=title&skey=%EC%84%9C%EC%84%B1&x=20&y=8§ion=165&category=205&no=12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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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고조(宗高祖)묘재(墓在)에 관한 이야기

 

 

 

  집안의 뿌리, 즉 그 집안의 來歷과 歷史를 말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先祖님들의 山所(墓)를 찾지 않고는 敢히 論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家門의 자랑을 하기에 앞서 族譜도 管理하지 못하고, 가까운 先祖님의 山所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하기는 어찌하다가 너무도 家庭이 貧困하여, 특히 長孫이 어렵게 살다보니 先祖님들의 山所도 돌보지 못하고 게다가 族譜마저 火魔에 빼앗겨 이제는 그 뿌리마저 疑心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2001년 가을 10代祖이신 종고조(宗高祖, 字 俊伯 肅宗壬戌五月十八日生 甲寅進士官通政大夫尙州牧使己亥十月初四日卒墓在尙州郡牟西面可幕里後麓酉坐原)산소를 찾아 故鄕 忠北報恩郡懷仁面艾谷二里(上甫古室)高和發高介에 移葬하여 모시니 그나마 千萬多幸이라 생각된다.

이에 27世.廣錫 再堂叔님의 回顧錄을 올려 그간의 우리 집안의 어렵고 부끄러웠던 일들을 돌아보고 다시는 後孫들이 이같은 부끄럽고 죄스런 일 없이 선조님들을 잘 모시며 家門의 榮光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廣錫님의 回顧錄>
“波瀾萬丈한 人生 77年 稀稀壽를 살면서 단 한 가지도 남기고 갈 것이 없다. 日 祖上님들의 威信事業에 協助하였다는 것뿐이다. 至今으로부터 45年前인 1957年 炳熙(字 鳳煥)祖父님께서 孫子인 나(廣錫, 당시 32세로 10月에 除隊하여 歸鄕)를 불러 懇曲하게 이르시기를 慶尙北道 尙州郡 牟西面 可幕里에 尙州牧使로 계셨던 너희 9代組 할아버지 兩位분 산소가 있으니 꼭 산소를 찾아 時祭를 지내도록 하라는 遺言을 하시면서 산소에 가지 못한 事緣도 함께 말씀하셨다. 事緣은 이러 했다. 先代 祖父님들 께서는 말(馬)을 타고 時祭를 다니셨으나 祖父님代에서는 家勢가 어려워저 걸어서 往復 5日이 걸려 다니다 보니 旅費도 만만치 않아 도저히 해해연연(每年) 못 다니게 되셨다고 한다. 그러다 5~6年間 時祭를 못 갔는데 尙州 할아버지 산소를 관리해주는 분(산지기)이 찾아와서 동내(가막리) 張家놈들이 우리 산을 세부 측량하여 張家들 산으로 해 놓았으니 어르신께서 가막리에 가 보셔야하겠다고 하여 祖父님께서 가보시니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明治 44~5年 原因無效訴訟을 提起하여 山을 도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祖父님께서는 많은 채무를 갚기 위해 종종 兄弟분들에게 協助를 要請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하는 수 없이 可幕里에 있는 山을 賣却하여 債務를 整理하셨다고 한다. 그 후 1年이 되었을 때 산소를 관리해주시는 분이 와서 가막리 張家놈들이 尙州牧使 할아버지 산소의 石物을 넘어뜨리고 碑石을 부수어 둠벙에 집어 넣었다고 하여 祖父님께서 가보시니 사실이었으나 束手無策이라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祖父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꼭 銘心하여 이 할아버지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끝내셨다.
그 후 나도 對策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 차에 20여년전 報恩에 엄청난 水害가 있어 復舊事業을 하던次에 동생(參錫)에게 이야기 했더니 찾아가 보자고 하여 동생 트럭을 타고 尙州郡 牟西面 可幕里로 달려갔으나 墓地의 誌石이나 표시물이 없으니...
날도 저물고 해서 동네에 차를 세워 놓고 있노라니 한 사람이 오고 있어, 동네 아무 사랑이라도 좋으니 하룻밤 유할 수 있겠느냐 했더니 “상주가 가깝고, 차도 있는데 旅館으로 가지 왜 이 동네에서 쉬냐”고 하여 뭘 좀 수소문 할 것이 있어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럼 우리 집으로 갑시다.”해서 그 집으로 가서 서로 通姓名을 하고 보니 姓氏가 張氏 였다. 그래서 張先生 이 동네에 옛날 尙州牧使를 지내신 徐氏 묘라고 하며 石物도 쓰러지고 묵는 묘가 혹시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張氏 하는 말 “돈을 얼마 주실라오?”하기에 “우리 宗中에서 하는 일도 아니고 내 형제가 하다 보니 많이는 못 드리고 30萬원 드리지요.” 했더니 “先代 祖上墓를 찾는 사람들이 돈 30萬원이 뭐요”하며 말문을 막는다. 해서 동생이 밖으로 나가 얼마 후 돌아오더니 “형님 그만 잡시다.”하니 張氏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 동생이 할아버지 산소를 찾았다고 하여 물어보니 동생이 그 사이 張氏네 內室로 가서 아주머니한테 諒解를 구하고 承諾을 얻어 상세하게 물어 보았더니 아주 세세히 알려 주시더라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張氏가 와서 “徐主事”하고 불러 왜 그러시오. 했더니 “산에 갑시다.”하여 따라가 보았더니 祖父님 遺言 대로 틀림이 없어 잔 올리고 돌아와 당숙(정모, 정택)을 모시고 가서 今草를 하고 왔으나 역시 또 束手無策이던 次에 우리 宗中에서 故鄕 忠北 報恩郡 懷仁面 艾谷二里(上甫古室)高和發高介에 移葬하여 모시니 우리 長孫婦에 功이 제일크고 長孫인 영수(明知大敎授) 內外가 장하며, 故 범석 형님 내외분께도 고맙게 생각하고, 또 무엇보다도 동생(삼석)의 勇斷은 100人至上이라 생각한다.” 以下 省略

 

 

 

 

 




P 워나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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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丘 徐氏 (대구 서씨)

 
시조 : 서한 (徐閈)
집성촌 : 경북 달성군 일원

대구 서씨(大丘徐氏)는 시조(始祖) 한 (閈:자는 인리)이 고려조(高麗朝)에서 군기소윤
(軍器少尹)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달성(達城:대구의 별호)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대구(大丘)로 삼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낭장(郎將)을 지낸 영(潁)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추정(推定)
되나 확실(確實)한 고증 자료가 없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는 없다.
대구 서씨(大丘徐氏)는 시조(始祖) 한(閈)으로부터 7세손 익진(益進)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최근(最近:1979년) 중간(重刊)된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모든 서씨(徐氏)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한 가문(家門)으로 손꼽히는
대구서씨(大丘徐氏)는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이름을 날렸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사가정(四佳亭) 거정(居正)과 약봉(藥峯) 성(省)을
들 수 있다.
거정(居正)은 1420년(세종 2)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둘째 아들이자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의 외손(外孫)으로 태어나 24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
(司宰監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에 이르는 6대왕조
(六代王朝)에 걸쳐 전후 45년 간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대제학(大提學:홍문관,
예문관의 정 2품 벼슬) 등을 지내며, 대학자(大學者)로 더욱 명성을 날렸다.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능한 그는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한문학(漢文學)과 천문(天文)
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고,「경국대전(經國大典)」ㆍ「동국통감
(東國通鑑)」ㆍ「대동여지승람(大東輿地勝覽)」등의 편찬(編纂)에도 참여했으며 왕명(王命)
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한편 신라(新羅)이래 조선(朝鮮) 초기에 이르는 시문(詩文)을 엮은 「동문선(東文選)」과
「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펴내는 등 조선조(朝鮮朝)의 한문학을 집대성하여
참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함재공(涵齋公) 해(嶰)의 아들인 성(渻)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나이 20에 문명(文名)을 날려 사림(士林)의 존경(尊敬)을
받았으며, 선조(宣祖) 때 5도 (五道)의 관찰사(觀察使)와 호조(戶曹)ㆍ형조(刑曹)ㆍ
공조 판서(工曹判書)등을 두루 역임한 후 광해군(光海君) 때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 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중추부의
종 1 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그의 자손중에서 3대(代) 정승(政丞), 3대 대제학(大提學),
3대 대학자(大學者)가 배출되어 서씨(徐氏) 가문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성(渻)의 네 아들 경우(景雨)ㆍ경수(景需)ㆍ경빈(景霦)ㆍ경주(景周) 형제중에 맏아들
경우(景雨)는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차남 경수(景需)의 현손(玄孫) 종제(宗悌)의
딸이 영조비(英祖妃)가 되었으며, 종제(宗悌)의 현손(玄孫) 용보(龍輔)는 영의정
(領議政)을 역임했다.
넷째 아들 경주(景周)는 정신옹주(貞愼翁主:선조왕의 장녀)와 혼인(婚姻)하여 선조
(宣祖)의 부마(駙馬)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서 영의정(領議政) 6명과 좌의정(左議政)
1명, 대제학(大提學) 5명이 배출되어 경수(景需)의 후손과 함께 명문(名門)의
기반을 다졌다.
서문(徐門)이 배출한 많은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열력(閱歷)을 살펴보면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문중(文重)과 종태(宗泰), 영조(英祖) 때 영의정 지수(志修),
순조(純祖) 때 당보(堂輔) 등이 뛰어났고, 대제학(大提學) 명응(命膺)ㆍ유신(有臣)ㆍ
영보(榮輔)ㆍ기순(箕淳)과 판서(判書)를 지낸 문유(文裕)ㆍ문익(文益)ㆍ종급(宗伋)ㆍ
종옥(宗玉)ㆍ명빈(命彬)ㆍ호수(浩修)ㆍ회수(晦修)ㆍ유방(有防)ㆍ유린(有隣)ㆍ능보(能輔)ㆍ경보(耕輔)ㆍ좌보(左輔)ㆍ유구(有榘)ㆍ유보(裕輔)ㆍ재보(在輔)ㆍ가순(嘉淳)ㆍ영순(英淳)ㆍ헌순(憲淳)ㆍ상우(相雨)ㆍ상정(相鼎)등이 대표적이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법부대신(法部大臣:법부의 우두머리 되는 벼슬) 광범(光範)과
의병장(義兵將) 상렬(相烈)ㆍ병희(丙熙)가 유명했고,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재필(載弼)은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여 민족독립 운동에 일생을 바쳐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다.

 

          - 부천족보도서관에서 http://www.jokbo.re.kr/book/index.html?fnkey=10701069&fn=1070&sn=사&v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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