磨斧作針 마부작침

몇 년 전 강남시니어클럽 소속으로 의사 면허시험 감독을 하다가 급훈으로 '磨斧作針'이라는 것을 보고
참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메모를 한 적이 있다.
오늘 장롱 속에 걸려있는 겨울 신사복 바지를 정리하다 주머니에서 뭔가 만져져서 뒤져보니 꺼내지 않고 세탁하여
꼬깃꼬깃 구겨진 磨斧作針 메모지였다. ㅎㅎ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 사자성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타고난 재능만 믿지 말고 열심히 갈고 닦아 뛰어난 재능이 잘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이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일부와 정치인 중엔 공짜심리가 팽대하고 그 심리를 이용하려는 게 눈에 보여 걱정입니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 노력으로 습득되는 기술도 많이 있지요.
누구나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자성어와 같이 바늘을 만들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매일 꾸준히 도끼를 가는 끈질긴 노력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이 요즘 우리에게 필요하다 싶습니다.
우리에게 특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꿈과 목표를 세우고 그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회복되어 이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빌고 빌어 봅니다.
우연히 다시 생각하게 한 마부작침이란 사자성어는 급변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요즘, 우리가 話頭로 삼고 붙잡아야 할 중요하고 본질적인 삶의 가치와 태도라고 생각되어 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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節義廉退 顚沛匪虧

- 절의렴퇴 전패비휴 -

 

 

 

절개와 의리와 청렴함과 물러남은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이지러뜨리지 않는다.

 

節:마디 절, 義:옳을 의, 廉:청렴할 렴, 退:물러날 퇴

顚:엎어질 전, 沛:자빠질 패, 匪 대상자 비 虧:이지러질 휴

 

論語에서 孔子가 이르기를 “뜻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살기 위해 仁을 해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 仁을 행한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했다. 사람의 도리인 仁德을 갖춘 사람은 仁義를 지킬 수 없을 때 命을 아끼느라 仁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仁을 행한다는 가르침이다. 李白 또한 봉황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는 않는다〔봉기불탁속鳳饑不啄粟〕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孔子가 이른 殺身成仁은 正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다.

- 글 김태홍(金台洪) -

 

 

 

 

 

孔子의 77代孫 孔新元先生께서 보내옴. 戊子年 新春 中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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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군자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면서 즐거움을 찾는 다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이것 저것 찾다보니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난 50%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며 정년 후의 지금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리고 했는데 이또한 적어도 50%이상은 바르게 살았지 않나 싶다.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반평생을 좋은 학생을 모아 교육에 매진하였고, 특히 직업교육을 위해 마지막에는 컨벤션분야로 학교를 특성화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로 만들어 놓고(물론 함께한 선생님들의 노력이 컷다.)나왔으니 가장 자랑스럽고 또 즐거운 일이다.

 

엊그제는 34년전 졸업생들이 담임이라고 초청을 하여 함께 저녁을 하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많은 제자들이 훌륭하게 되어 앞에 있음에 더욱 행복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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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삼락(君子三樂)

 

전국시대, 철인(哲人)으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B.C. 372?∼289?)는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한편 공자는《논어(論語)》계시편(季시篇)에서 損者三樂(손자삼요), 즉 손해되는 세가지 좋아함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교락(驕樂:방자함을 즐김)

일락(逸樂:놀기를 즐김)

연락(宴樂:주색을 즐김)

"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_ 〈유사어〉익자삼요(益者三樂)

 

여러 인터넷 사이트와 고사성어 사전 참고함

참고 : http://cafe.daum.net/o-un/YM7B/61?docid=1FMa0|YM7B|61|20101203160641&q=%B1%BA%C0%DA%BB%EF%B6%F4&srchid=CCB1FMa0|YM7B|61|2010120316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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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지회(絶纓之會)

 

갓끈을 끊는 연회라는 뜻으로 옛 고사에서 비롯됨. 이유가 이 고사를 예로 들어 동탁에게 간언하길 초선을 여포에게 내리면 여포의 충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고사를 보면 너그러운 배려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이야기들을 많이 본다. 그 중 「설원」復恩篇에 소개된 춘추시대 춘추오패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장왕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와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는 밤까지 계속 돼 장왕은 불을 밝히고 사랑하는 허희를 시켜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돌리게 했다. 그 때 공교롭게도 한줄기 광풍이 불어와 연회석을 밝히던 촛불이 꺼져버렸다.

 

그 사이, 한 사람이 허희의 소매를 끌어 당겨 희롱했다. 그러자 허희는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당겨 끊어버렸다.

 

허희는 장왕에게 “마마, 어떤 사람이 무엄하게도 어두워진 것을 틈타 첩을 희롱했습니다. 첩이 그 자의 갓끈을 잡아 당겨 끊어 놓았으니 빨리 불을 밝혀 그 무례한 자를 찾아 엄벌해 주소서”하고 고했다.

 

그러나 장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경들은 모두 갓끈을 끊고 실컷 마시도록 하라. 갓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마음껏 즐기지 않는 자이다”하고 명해 백관들이 모두 갓끈을 끊은 후에야 불을 밝히게 했다. 그렇게 하여 끝까지 즐거운 분위기로 잔치를 마치게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장왕이 진(晉)나라와 싸울 때였다. 장왕이 위급할 때마다 한 장군이 목숨을 내던지고 달려와 장왕을 구하곤 했다. 장왕은 의아하여 그 장군을 불러 “과인이 덕이 없어 그동안 그대를 몰라보았는데 그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장수는 “저는 3년 전에 마땅히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연회가 있던 날 밤 술에 취해 그만 무례를 저질렀지만 왕께서는 이를 감추시고 제게 벌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저의 간과 뇌를 땅에 들어내고, 목의 피를 땅에 뿌려서라도 그 은혜를 갚을 것을 소원해 왔습니다. 신이 바로 갓끈이 끊어졌던 바로 그 놈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연회를 갓끈이 끊어진 모임이라는 의미로 절영지회(絶纓之會)라고 했다.

 

무릇 다스리는 자(治者)의 그릇(度量)이 초장왕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논어 경영학과 인터넷에서

 

  내가 軍 복무시절 雙方訓練으로 방어훈련을 하던 중 새벽의 일이다. 우리 소대 병사 한명이 보고하기를 좌측 능선 멀리에서 敵(假想敵)이 출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나리오에 없는 지역에서의 상황이라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라 판단하고 경계만 강화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무려 1개 중대 병력이 우리 소대를 포위하여 압박을 하고 있지 않는가! 정말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 實戰과 같은 訓練이기는 하지만 정말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실제 肉薄戰이 벌어져 衆寡不敵으로 束手無策이었다. 따라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어 기가 막혔다. 할 수없이 나는 최후(?)방어 수단으로 小銃에 着劍을 시켜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심판관이 있었다면 규정이 있기에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가상적군이 물러나고 있었고 우리소대에서 제일 체구가 작고 약하게 생각했던 유일병이 적의 중대장을 대검으로 위협하여 포로로 잡고 있지 않은가! 정말 기막힌 일 이었지만 유일병 덕분에 우리 소대는 더 이상의 부상병 없이 위험을 벗어 날 수 있었다.

 

  나는 내 부하 유일병이 평소 병치레를 할 때마다 군위관을 통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하루는 영외 약국에서 더 좋은(?)약을 구입하여 복용시켜 건강을 회복시키기도 하는 등 부하를 돌 본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로 인하여 소대장과 소대원들이 어려움에 처한것을 보고 평소 소대장에 대한 고마움이 이 같은 용기를 갖도록 하여 우리 소대를 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 나는 ‘논어 경영학’에서 절영지회(絶纓之會)를 읽고 관리자는 꼭 원칙과 규정만을 가지고 조직을 관리하거나 통솔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새삼 생각하면서 38년전 옛날 일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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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夜雨中 - 추야우중

   

秋 風 唯 苦 吟 (추풍유고음)

世 路 少 知 音 (세로소지음)

窓 外 三 更 雨 (창외삼경우)

燈 前 萬 里 心 (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출처: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hanmun/choe-chi-won-chu-ya.htm

 

 

題伽倻山讀書堂(가야산 독서당에서 짓다)

                                           

                                                                                                                        崔致遠(최치원)

 

狂 噴 疊 石 吼 重 巒 (광분첩석후중만)

겹겹이 바위틈을 미친 듯이 내뿜어 뭇 봉우리를 울리니

人 語 難 分 咫 尺 間 (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 恐 是 非 聲 到 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

故 敎 流 水 盡 籠 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둘러놓았다네.

 

                                                                                                                             出處 : 大紀元時報

 

 

 

어딘가 떠나고 싶다.  

                                                                                            

 

                                     갈곳 정하지 않고

                                     정처없는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가다가 지치면 하늘을 보며 누워 잠들고

                                     가끔은 쉴곳을 찾지 못해서 지친 발걸음도 되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길을

                                     그렇게 떠나고 싶다.

 

                                     마음이 무거워 어딘가에다 조금은 덜어내고

                                     지독하게 밀려드는 그리움도 조금은 떠넘기고

                                     한동안 아무 생각없이 떠돌다가

                                     이른 아침 맑은 햇살에 고개 내미는 풀잎처럼

                                     다시 세상에 고개를 내미는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을 하고 싶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여도

                                     지금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이 그리움을

                                     벗어 놓고 올 수 있는

                                     어딘가를 향해 떠나면 좋겠다.

 

                                     다시 그리워하지 못하는 망각의 강에 빠져도

                                     이제 그리워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가고 싶다.

 

                                    지워내도 되는 일

                                    버려내도 되는 기억

                                    남겨두어야 하는 가슴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살아가는 동안

                                    다시는 버리고 주워담고 하는 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떠나가고 싶다.

 

                                    어딘가 떠나고 싶다.

                                    그대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닌 이 세상에서...

 

 

                                                                                                                                                    출처: http://cafe.daum.net/leeruth/6cuq/1252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때 사람으로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출처: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hanmun/choe-chi-won-chu-y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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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友投分 切磨箴規

- 교우투분 절마잠규 -

 

벗을 사귈 때에는 서로가 분수에 맞는 사람끼리 사귀어 서로 열심히 닦고 배워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덕행을 갈고 닦아서 빛을 내며 친구 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益者三友

- 익자삼우 -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해서 친구도 가려서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있는 익자삼우(益者三友)는 사귀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세 가지의 벗, 즉 정직한 친구[友直], 성실한 친구[友諒], 박식한 친구[友多聞]를 사귀라는 말이다.

 

 

 


損者三友

 - 손자삼우 -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있는 손자삼우(損者三友)는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하는 벗[友便辟]과 착하기만 하고 줏대가 없는 벗[友善柔]과 말만 잘하고 성실하지 못한 벗[友便佞]을 사귀면 손해가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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脣亡齒寒<순망치한>

 

 

나 아니면 안되고, 나 혼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똑똑한 사람일까?

 

‘국내 최고경영자(CEO)들은 오늘날 자신을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습관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을 1위로 꼽았다.’라고 하는 기사를 몇 년 전에 보았다.

 

순망치한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한편도 온전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인간관계(人間關係, human relations)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특히 이 말이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절실하다는 얘기를 CEO들이 증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도멸괵 순망치한(假道滅虢 脣亡齒寒)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 5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말엽(B.C. 655), 오패(五覇)의 하나인 진(晉)나라 헌공은 괵(虢)나라를 공격할 야심을 품고, 괵(虢)나라를 공격하려면 진(晉)나라와 괵(虢)나라 중간에 위치하여 통과해야만 하는 우(虞)나라 우공(虞公)에게 길을 지나게 해주면<假道滅虢> 많은 재물을 주겠노라고 제의하고 우나라를 지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공(虞公)이 이를 수락하려했으나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寄)는 헌공의 속셈을 알고 우공에게 간언했다.

"전하, 괵(虢)나라와 우(虞)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습니다. 괵(虢)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공은 “진과 우리는 동종(同宗)의 나라인데 어찌 우리를 해칠 리가 있겠소?”라며 듣지 않았다. 궁지기는 후환이 두려워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는 궁지기의 예견대로 12월에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공(虞公)을 포로로 잡았다.

이와 같이 입술(脣)과 이(齒)의 관계처럼 결코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를 脣亡齒寒<순망치한>이라 한다. 동의어로 순치지국(脣齒之國)·순치보거(脣齒輔車)가 있으며, 유사어로 조지양익(鳥之兩翼)·거지양륜(車之兩輪)이 있다.

 

그런데 사자성어로 꼽힌 습관은 이 밖에도 △형설지공(螢雪之功)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와신상담(臥薪嘗膽) △삼고초려(三顧草廬) △격물치지(格物致知) △읍참마속(泣斬馬謖) △절차탁마(切磋琢磨) △무한추구(無限追求) △선즉제인(先則制人) 등이라고 한다.

 

출처:네이트 지식 등 인터넷 사이트

 

 

민경조씨의 <논어경영학>

 

나 혼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똑똑한 사람일까?

회사에서 회의를 열 때, 진행자 스스로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아는 것이 많다고 여기며

회의를 일방적으로 진행하거나, 아랫사람의 의견을 다 듣지 않고서 자기주장이나 의견만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회의는 회의장이 아니라 졸음이 엄습하는 연설장으로 바뀔 것이 뻔하다.

그러한 회의에서는 의견교환이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것은 물론 참석자들이 절대 의견다운 의견을 내 놓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는 생각이 모두에게 팽배한 것이다.

회의 진행자나 윗사람은 자신이 풍부한 정보를 가졌어도 많이 알고 있지 못하며 정보가 없는 듯이 행동하면서 묵묵히 아랫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언로가 열린 채 활발한 의견교환이 가능해져, 마치 새벽 어시장의 활기를 보듯 좋은

발상이 튀어나오고 활기띠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

 

중학교 시절 수학 시간에서 배운 원리 하나를 소개한다.

'삼각형에서 두 변 길이의 합은 빗변의 길이 보다 길다'

즉, '빗변이 아무리 길어도 남은 두변의 길이를 합친 것 보다는 짧다' 는 것이다.

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만 갖고 경쟁에 나설것인가?

아니면 세변의 길이를 합쳐 대항할 것인가?

내 지혜에 조직 내 다른 사람의 지혜를 합치면 훨씬 더 큰 성과를 끌어 낼 수 있다.

 

아직도 나 혼자 모든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구성원 모두의 힘을 집결해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것인가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서 한 가지 고사를 소개 한다.

 

바로 널리 알려진 가도멸괵 (假道滅虢) 순망치한 (脣亡齒寒)의 고사다.

 

춘추시대 말 진나라 임금 헌공은 이웃의 소국인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욕심내고 있었다.

헌공은 먼저 바로 옆에 위치한 우 나라에게 괵나라를 칠터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소위 가도멸괵의 소사를 낳은 사건이었다.

우 나라는 충신 궁지기(宮之奇) 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길을 빌려주었고,

진나라는 그 길로 달려가 괵 나라를 공격해서 멸망시킨 다음, 돌아오는 길에 우 나라마저 삼켜버렸다.

 

다음은 "한시외전(漢詩外傳)" 에나오는 이야기로

 

괵 나라의 임금이 나라가 망하자 도망가면서 마부와 대화한 내용이라 한다.

옛날 괵 나라 임금이 나라가 망하여 도망을 가던 중이었다.

임금이 마부에게 목이 마르다고 하자 마부는 곧 맛있는 술을 바쳤다.

또 배가 고프다고 하자 고기반찬을 곁들인 식사를 대령하였다.

"어떻게 해서 대령하였느냐? "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왜 미리 준비해두었더냐?"

"임금님께서 도망가실 때 굶주리고 목이 마르실까 봐 준비했습니다."

"그럼 너는 내가 망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던 모양인데,

왜 진작 간(諫)하지 않았느냐?"

"임금께서는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시고 올바른 말은 싫어하셨습니다.

저도 간언들일까 생각해 봤으나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만 두었습니다. "

"그래? 그럼 내가 망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임금께서 망하신 것은 지나치게 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번성하지 않고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임금님 주위에 임금님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고 임금은 마부의 말을 듣고 기뻐서

수레에 몸을 기댄 채 웃으며 말했다.

"허허, 똑똑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다니...."

말을 마치자 그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극도로 피곤함을 느껴 마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마부는 살며시 자기 무릎을 빼고 대신 돌을 베게로 받쳐주고는 떠나버렸다.

그 후 임금은 들판을 헤매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아첨하는 말만 듣고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바른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바른 말을 하는 신하는 곧 도태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임금님 혼자 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똑똑한 지도자가 망한 이유는 혼자서 똑똑했기 때문인데, 사실 임금님이 가장 똑똑한게 아니고 그렇게 착각한 것이라 생각된다.

삼각형의 빗변이 스스로 길다고 아무리 뽐내도 단지 세변가운데 다른 두변보다 조금 길 뿐이다.

남은 두 변을 빼놓고 빗변만 있어서는 삼각형을 절대 완성할 수 없다.

 

민경조 코오롱그룹 부회장 <논어경영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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