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정공원(四佳亭公園)

 

동대문구 답십리3동 신답사거리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면목3동 1083일대 용마산길과 만나는 도로가 사가정길인데, 너비 20m에 총 길이 3,200m이며 이 도로끝 부분에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이 있다.

사가정역에서 용마산길을 가로질러 용마산기슭에 사가정공원이 있다.
사가정길의 명칭과 사가정공원은 아차산 앞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 초기 학자이자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의 호 사가정(四佳亭)에서 따온 것이다.
세종~성종 때의 학자인 서거정은 '동국통감(東局通監)' '동문선(東文選)' 등 많은 저서와 시문을 남겼다.                                    
출처 : http://blog.paran.com/dongi4860/15620279

 

서거정(徐居正. 1420~1488) .. 본관은 대구, 달성(大邱, 達城), 자(字)는 강중(剛中), 호(號)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이며,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  세력가이었던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144년(세종)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며, 世祖에 이르러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지낸다. 명문가문의 일원으로 평생 정계의 핵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45년간, 여섯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大提學)을 무려 23년동안 독점할 정도이었다. 사가집(四佳集) 등 개인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 같은 관찬서(官撰書)의 편찬작업을 주도하여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출처 :  서거정 묘소|작성자 : cyjin999

 

한중(閑中) ... 한가로운 가운데

  

백발홍진열세간  白髮紅塵閱世間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간하락득여한  世間何樂得如閑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음한작내한보  閑淫閑酌乃閑步   한가로이 읊조리고,한가로이 술 마시며,한가로이 거닐고

한좌한면한애산  閑坐閑眠閑愛山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사랑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cyjin999/150085534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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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사가정공원-서거정 시비-| 참고 :개미실 http://blog.naver.com/roaltlf/10386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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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공원에 많이 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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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적 늘 증조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약봉할아버지(http://daegusuhmoon.com.ne.kr/bosarok/yakbong.htm) 산소를 어제에서야 찾아뵙고 성묘를 했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기회가 없었고 작년에는 아들 동현이를 앞세워 포천시내까지 갔으나 정체로 도로가 너무 막혀 시간에 쫒겨 포기 했었다. 어제는 축석리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있게 약봉할아버지 묘역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산소들은 종손께서  잘 가꾸고 있어 고마웠으나 뒤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주위 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도라산 선산들은 비무장지대가 되어 성묘도 어렵운 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다싶다.   

 

 

 

 

 

 

 

 

 14代祖  忠肅公 藥峯할아버지 비각과 산소 뒷면 담장

 

 12代祖 固 參議公할아버지 산소와 13代祖 涵齋公(함재공)할아버지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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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제학(八大提學) 문형(文衡) 배출

 

  자신의 문벌(門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높은 벼슬에 있었던 조상의 수를 헤아리고 혹은 대과급제자의 수가 많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환자(科宦者)의 수는 정치적 혁명기의 처신이나 혹시는 집안에 왕비가 나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한 결과로 얻은 덤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위 '세상이 알아주는 집안'이라 할 때는 그 벼슬보다는 훌륭한 학자인 석학거유(碩學巨儒)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를 첫손으로 꼽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삼한갑족의 최상위로 광김연리(光金延李)를 손꼽는 까닭은 당대 학자로서 최고인 학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인 '대제학, 문형'이 8명 혹은 7명으로 조선조 제1, 2위였기 때문이다.

  '문형'은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대제학'의 별칭인데,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되는 관직이 아니었다. '문형'이 되자면 문과 대과 급제자로서도 원칙적으로 호당(湖堂) 출신이라야만 가능했다. 조선조에서 '호당'이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文臣)으로서 임금의 특명(特命)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을 가리키며 그러한 특전으로 학문을 하는 것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였다.

  '대제학'으로서도 '문형'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弘文館) 대제학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 및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세 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 그리하여 '문형'은 위 3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위이므로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여겼으며 품계(品階)는 비록 판서와 동등한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삼공(三公) 곧 삼정승이나 육조(六曹) 판서보다도 높이 대우하였다. 또 조선조의 벼슬들은 국법에 따라 모두 임기의 기한이 있었는데, '문형'은 본인 의사에 따라 종신직이었다.

  참고로 우리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연소의 기록을 세운 이는 광주이씨(廣州李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었는데, 20세에 문과에 오르고 23세에 호당에 들었으며, 31세에 문형이 되었고,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이었다.        

 

참고 조선조의 '문형'은 도합 133명인데,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고, 5명 이상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 8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 7명, 신안동김씨(장동김씨) 6명, 달성서씨 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 5명 등 7씨족뿐임

 

조선 역사상 3대 대제학이 배출된 집안으로는 광김 사계 자손, 연안이씨 월사 가문(廷龜―明漢―一相) 외에도, 전주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의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자손으로 '敏서―觀明―徽之' 달성서씨 약봉(藥峯) 서성(徐)의 자손으로 '有臣―榮輔―箕淳(1791-1854)' 등이 또한 그러하였으니, 이 4 씨족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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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주, 약과를 팔아 공부시킨 서성(徐)

1588년(명종13년)~1631년(인조9년)

 선생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峰), 본관은 달성, 해(嶰)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증조는 사헌부 장령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조졸했고 어머니는 맹인(盲人)이어서 숙부인 서엄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으나 어머니가 훌륭한 현모이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드님을 훌륭하게 키웠다. 아드님 교육을 위하여 서울 약현(藥峴)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약주, 약과를 만들어 팔아 뒷바라지를 하며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귀봉 송익필(龜峰 宋翼弼)문하에서 공부를 시키어 1586년(선조19)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시교(侍敎), 봉교(奉敎)등을 거쳐 예조좌랑에 이어 병조좌랑이 되어서는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이어서 호소사(號召使-근왕병을 불러 모으는 사신)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이 되어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와 같이 함경북도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선생이 계교를 써서 홀로 탈출하여 북평사를 지낸 관북지방의 의병대장 정문부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어 적을 쳐부수고 두 왕자를 비롯하여 모두를 구해냈다. 그리고 행재소(行在所-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 머물러 있는 곳)에 이르자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명장 유정의 접반사가 되었다.
 그 후 삼남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응징하여 관기(官紀)를 바로 잡았다. 돌아 와서는 제용감정(濟用監正-모시, 모피, 인삼, 능나주단 같은 고급물품의 진상(進上)사여(賜與)를 관장하는 관청)에 특진되었고 이어서 경상우도 감사가 되어서는 고성(古城)을 수축하여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으로 만들었으며 충신열사의 사당을 지어 숭모사상을 높이었다. 이어서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한성 판윤이 되어서는 총관주사(總管舟師)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5)에 계축옥사(癸丑獄事-대북파가 일으킨 옥사로 간흉 정인홍, 이이첨 일당이 당시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등이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 였다고 무고하여 유경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홍부원군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다음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가 일어나자 약봉선생도 역적의 일당이라고 몰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단양으로 귀양 보냈는데 다시 영해로 옮기고 또다시 원주로 옮기었다.
적소(謫所)에서 11년 동안 있었는데 공의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이 항상 의연자약하면서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1623년(광해군15) 65세 때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 되어 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종1품 숭록대부에 승차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도 왕을 호종하고 호병을 물리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1631년(인조9) 74세로 서거하였다.
 약봉선생은 학문을 즐겨 당대의 대학자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귀(李貴)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렸다.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고 묘는 포천읍 설운리에 있다.
 약봉선생은 어진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성장하여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뛰어난 지략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해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우리나라애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착한 일을 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하였다.
 약봉이 별세 후 약300년간 인조조(仁祖朝)에서 고종조(高宗朝)에 이르기까지 대구서씨 문종에서 영의정이 8명, 우의정 1명, 대제학 6명을 배출하여 크게 영달한 명문(名門)이 되었다.
 또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자손이 번창 영달하는 것은 그 선조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행실이라고 일컫는 효행이 투철하여 그 음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흘읍 하송우리에서 웃송우리로 가는 왼쪽 노변에 “벼락바위”라고 불리우는 바위가 있는데, 벼락바위라고 이름 지어진 연유는 약봉선생의 선조가 효행이 극진한 분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명당자리에 안장시켜 드리고자 유명한 지관을 찾아가 명당자리를 구하여 광중을 지어 하관을 하고자 하는데 그 때 다른 유명한 지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그 곳이 천하명당인 것은 틀림없으나 하관과 동시에 상주인 장자가 즉살한다. 그 까닭은 산소자리에서 앞으로 멀리 보이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때문이다.”라고 자세히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하관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상주인 장자가 이르기를 아버님을 명당에 모셔드리고 또한 후손이 잘 된다면 내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며 여러 사람의 만류를 물리치고 하관을 강행하니 그때 별안간 뇌성벽력으로 벼락이 쳐 바위가 깨어져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주인 장자도 무사하였고 그 후손이 번창 영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벼락을 쳐 깨어진 바위틈에는 향나무가 자생하여 자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http://www.pcs21.net/culture/cultural_inheritance/content/content_4114.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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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할아버지에 대한 기록

 

서성(徐:155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판중추부사.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서해의 아들이며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서 1586년(선조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159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고,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명에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정랑(兵曹正郞), 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綎)을 접대했다. 그 후 암행어사로서 삼남을 훈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5개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뒤에 호조, 형조, 공조 3조의 판서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판서에 복직,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학문에 능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이인기(李麟奇) 등과 남지(南池: 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 ☆☆☆☆☆

  약주(藥酒) - 술이 다 된 뒤에 술독에 용수를 박아 떠낸 맑은 술.  **********************************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에는 탁주와 청주가 있는데, 청주를 조선시대 중엽에는 약주라 일컬었다고 한다. 현재 주세법상 약주의 정의는 곡류, 기타 전분을 함유하는 물료 또는 고구마 전분당, 누룩과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하되 재(滓)를 제거하지 아니하고 혼탁성을 가지도록 제성(製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5년(1405)조에 ‘진약주(進藥酒)’라는 말이 나오고, 태종 7년(1407)조와 세종 15년(1433)조에 의하면 화재 때문에 왕은 약주 이외의 술을 금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약주라는 단어는 나오지만 약주가 무엇으로 어떻게 빚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임원십육지》에 처음으로 약주는 찹쌀로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인조 때의 정치가 서성(徐)의 호가 약봉(藥峰)이었는데, 서성이 좋은 청주를 빚었고, 그의 집이 약현(藥峴)에 있었으므로 그 집 술을 약산춘(藥山春)이라고 하였다 한다. 《규합총서》에는 약주제품(藥酒諸品)이라고 하여 여러 술 종류가 기록되었다. 즉, 구기자술, 오가피술, 복사꽃술, 연잎술, 진달래술, 소국주, 과하주, 백화주, 감향주, 송절주, 송순주, 한산주, 삼일주, 일일주, 방문주, 녹파주, 오종주방문, 어나주 등이다. 특히 경주 교동 법주(중요무형문화재 86), 경기 동동주, 한산 소국주, 김천 과하주, 중원 청명주 등은 유명하다. 이 밖에도 방문주, 향온주, 경면녹파주, 석탐주, 동정춘, 호산춘, 삼해주, 백일주 등이 있다.

 

 

<위의 글은 "김승호(kim,sng-ho)"씨의 홈페이지를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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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경영론에서

 

서약봉(徐藥峰)의 어머니-[이씨부인]

 

약봉(藥峰) 서성()의 어머니 이씨부인은 재덕(材德)을 겸비한 어진 부인으로,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명족을 이루어 문호를 빛낸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 눈을 다 못 보는 맹인(盲人)이었다.
그가 자람에 그의 아버지 이승지(李承指)는 늘 눈먼 딸을 측은이 여기고 어떻게라도 시집을 보내 그로 하여금 인생을 원한이나 없게 하여 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매파를 놓아 딸의 눈먼 것을 속여 혼인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신랑은 가난한 선비 서해(徐懈)이었는데, 혼인 날 신부 집에서 초례를 치른 다음 첫날밤에 신부를 대하고 보니 이  어찌 된 일이냐, 백년을 해로할 신부가 눈먼 장님이 아닌가.  너무도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선비라고 혼인에 속인 것이 분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혼례는 이루었으나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파혼이 늦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길로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신부를 살펴 보았다.「장님만 아니었더라면 ……」참으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앉아있는 신부의 모습은 비록 눈은 멀었을망정 몹시 어질어 보이고 덕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를 버리고 나간 뒤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부끄러운 나머지 필연코 목숨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 않을 것은 뻔했다.  그렇다면 이는 또한 적악(積惡)이 아닌가.  성현의 글을 읽은 선비로서 한 여자로 하여금 원귀(怨鬼)가 되게 한다는 일도 차마 못할 일이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뜻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신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첩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폐안(廢眼)이 된 몸으로 외람히 낭군을 섬기려고 하였으니 어떠한 미움과 죄라도 감수하겠습니다만, 부모로 말씀하오면 오직 이 한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손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옳지 않은 줄 아시면서 매작을 속인 것이니, 모든 죄는 이 한 몸이 지겠사오니 아예 첩의 부모를 책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 몸이 진작 죽지 못하고 있사옴은 오직 부모의 사랑을 저버리고 불효의 죄를 짓지 아니하려 함이었으나, 오늘 밤을 당함에 진작 죽지 못한 것이 한될 뿐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첩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를 들고 뜰을 쓰는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이는 첩의 부모와 첩의 세 사람을 살리시는 큰 은혜가 되겠습니다만 이를 어찌 감히 바라기나 할 수 있사오리까」하고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태도가 현숙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이 또한 도리에 맞으니 신랑이 속으로 크게 감동하고, 한편 측은한 마음이 들어 미처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신부는 품 속에서 칼을 꺼내 들고「이제 이 몸이 취할 길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하더니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문밖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던 이승지 부부가 뛰어들어 딸을 말리고 신랑에게 사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에 신랑도 마음을 돌려 그 날 밤을 무사히 치르고, 신부는 시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뒤로 이씨부인은 효로써 시어머니를 섬기고,  순함으로써 남편을 섬기니, 내외간의 의가 좋아 늘 집안이 화락하였고, 부인이 살림을 잘 꾸려 사는 것도 점차 나아져갔으나, 30도 되기 전에 아들 하나를 남긴 채 남편(서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씨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약현(藥峴)이라는 데서 살며 그 묘한 솜씨로 술을 빚고 약과를 만들어, 그것을 팔아 집안 살림을 해 나가며 아들의 학자금을 대었다고 하는 데, 오늘날의 약주(藥酒), 약과(藥果)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비롯한 것으로, 약현(藥峴)의 지명에서 떼어다 붙인 것이고, 서성의 호(號)를 약봉이라고 한 것도 거기서 떼어다 붙인 것이라고 한다.
아들 약봉은 선조(宣祖) 병술년에 과거에 오르고, 나중에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며느리인 송씨(宋氏) 또한 현덕이 있는 부인으로, 그 시어머니의 뜻을 잘 받들어 효도하고 남편을 잘 섬기니 보는 이마다 이 고부(姑婦)를 공경하고 그 현덕을 경앙(景仰)하였다.
이씨부인의 나이 90세에 이르고, 송부인의 나이가 60세가 되어도 그 시어머니 봉양을 한결같이 하였으며, 자손들 교훈이 또한 엄정하여 그 아들들이 뒤에 모두 현달(顯達)하여 경우는 우의정, 경주는 부마가 되니, 그 집안의 혁혁해짐이 그 어머니의 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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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들에 대한 기록

 

    서침(徐沈) 할아버지


    서침(徐沈)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균형(均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말 조선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을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을 하사받았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大丘邑誌. 〈張東翼〉

 

    

    서성(徐) 약봉 할아버지

    

    서성(徐) 1558(명종 1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해()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李章熙〉

 

    서경주(徐景霌) 할아버지

    서경주(徐景霌)1579(선조 12)∼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강(松岡).선조의 사위이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의 아들이다.1592년(선조 25)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약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선조를 호종하였다.이듬해 환도한 뒤 혼례를 올려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졌다. 정유재란 때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총관 겸 상방제조(摠管兼尙方提調)로서 항상 측근에서 시종하였다.이때 《선원록 璿源錄》을 감수한 공로로 통헌대부·봉헌대부로 계속 품계가 올랐다. 광해군 때,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아버지 성과 함께 반대하다가 아버지는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그 역시 크게 서용되지 못하였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가 복직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한 공이 인정되어 숭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복제 겸 금화내자제조(服除兼禁火內資提調)를 제수받았다.1631년(인조 9) 아버지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만년에 다시 상방원(尙方院) 및 관상감(觀象監) 제조와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참고 문헌 :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李文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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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徐氏世譜{2}(奎2021), 徐邁修(朝鮮)編.
          10編 6冊 木活字本 34.5×23.5cm.
          四周單邊 半郭:24.3×17.9cm.
          有界 11行 24字 注雙行.
          版心:上白黑尾.
          序:徐邁修.

     1818년(純祖 18) 徐邁修가 편찬, 간행한 大丘 徐氏族譜이다. 1809년에  간행하려
하였으나 재력 관계로 중단되었다가 1818년에 간행되었다.

大丘徐氏族譜는  1775년에  간행된 乙未譜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었는데, 이 族譜도 대개 乙未譜의  체제나  내용과 크게 다름이 없다. 내용은 徐邁修의 序와 舊跋·舊序·舊凡例를 포함한  凡例,  大丘徐氏年代考, 甲編부터 壬編까지가 世系,  癸編이  墓表·神道碑銘·墓誌銘·碑·補遺記·
名字行第圖이다. 乙未譜와 비교하면, 甲編은 乙未譜와 내용이 같고 乙編부터  辛編까지는 각각 1卷이 늘어나 乙未譜에서 21世까지 수록되었던 것이 24世까지 수록되었다.

壬編 版圖公派는 수록범위가 줄어 1代∼9代까지의 世系가 실려 있다. 癸編의 墓表,  神道碑銘, 墓誌銘은 乙未譜와 동일하고  補遺記에  "記公州譜周家譜受誣平山細谷面葦洞炭峴墓山晋州冬勿谷僞刻事"가 추가 되어 있다. 그 내용은  2世∼6世의  失傳五世와  관련된 것으로 公州金姓人家 所藏의 萬姓譜에 실려있는 2世∼6世의 世系에 대한 고증,  草溪周氏譜에서 발견된 5世 徐貴貫에 대한 고증, 墓에 대한 고증, 碑文 僞刻에  대한  고증이다. 「名字行第圖」는 28世∼32世까지 行列字를 정하고 있다.

1809년의 刊版時와  1818년 改刊時의 校閱者 및 鳩財者 명단이 모두 실려 있다[乙未譜에 대해서는 앞의  <奎5387>本의 解題 참조].

 

 

 

   大邱徐氏世譜{3}(奎2102), 徐有薰(朝鮮)編.
          9冊 木活字本 34.5×23.3cm.
          四周單邊 半郭:24.5×17.9cm.
          11行 24字 注雙行.
          版心:上白魚尾.
          序:徐有薰.

     1852년(哲宗 3, 壬子)에 徐有薰이 간행한 大丘徐氏族譜 重刊本이다.  刻板과  活版을
병용한 판본이다. 1775년에 刊行된 乙未譜에서 大丘徐氏族譜는 族譜의  체제와  형식이 고정되는 바,  1818년의 戊寅譜(<奎2021>)와 이 壬子譜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다만 世系에서 수록범위가 확대되었을 뿐이다. 戊寅譜가 24世까지의 世系를 수록하고 있는데, 壬子譜는 25世(26세)까지 수록하고 있다[同題의 <奎5387>, <奎2021>本  解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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